발자국
김종삼
폐허가 된 노천극장을 지나노라면 어제처럼
사자 한 마리 엉금 엉금 따라온다 버릇처럼 비탈진
길 올라가 앉으려면
녀석도 옆에 와 앉는다
마주 보이는
언덕 위
평균률의 나직한 음율이
새어나오는
古城 하나이,
일어서려면 녀석도 따라 일어선다
오늘도 이곳을 지나노라면
사자 한 마리 엉금 엉금 따라온다
입에 넣은 손 멍청하게 물고 있다
아무 일 없다고 더 살라고
폐허가 된 노천극장이 살아왔던 터와 같은 곳이라면
사자 한 마리는 사는 동안 내내 붙잡혀 있었던 운명일테고...
가다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다시 걸을 때마다 따라온다는 것은
끝까지 나에게 붙어있다는 뜻일테고...
손을 멍청히 입에 물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다시 노천극장 앞을 지날 때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듯 니 마음대로 해봐라라는 듯 방관하는 것일테고..
그러니
아무 일 없는 듯 더 살라고 말하는 것일테고...
캄캄한 밤에 가로등이 유일한 빛이던 때가 있었다.
가로등이 앞에서 환히 비추면 등 뒤에 따라오는 검은 나의 그림자때문에 섬� 무서웠으며,
가로등이 뒤에서 비추면 점점 거대해지는 나의 그림자때문에 앞으로 나가기가 또 섬� 무서웠었다.
그때마다 더욱 나를 무섭게 하던 것,
발자국소리.
호흡소리와 같은 박자로 골목길에서 울리던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림자.
언제나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길을 걷는 그 시간의 무서움만 있을 뿐...
정말 아무 일도 없이... 밤마다 같은 길을 걸었었다.
지금은 꿈길이 밤길이다.
일어나면 언제나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기에...
그것은 힘으로 차곡 쌓였다.
냄새에 찌든 노천극장 앞을 언제나 같은 속도의 걸음으로 걷는다.
어쩌면 점점 느리게...그래서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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