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존 버거] 글로 쓴 사진

by 발비(發飛) 2006. 10. 10.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열화당, 김우룡 옮김, 초판 2005.

역시나 바람소리와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이 책을 꺼내 천천히 읽었다.


8.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책의 쪽수로는 4쪽밖에 안 되는 글이니 짧은 글(인터넷상에서 읽기엔 꽤 긴 글인가?)이다.


처음 두 쪽은 ‘존 버거’의 지인인 ‘토니오’의 생활과 집을 보여준다. 건조하게...
짧은 분량인데 약간의 인내는 필요했다.
그저 글로 보여주는 사진이려니 하면서 사진을 만들어가면서 읽어 내려간다.
사진을 보듯이 읽어 내려가다,

어느 즈음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뻑뻑해졌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눈물샘이 젖어온다.

오늘 아침,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챙겨온 것이 있었는데 그 책 사이에 사진 한 장이 끼어있었다.
많이 보고 싶었던 사람의 사진이다.
그 사진을 한참 쳐다보다가 사진을 나의 얼굴 옆에다 대고 그와 내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주 많이.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이 몇 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환히 웃었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의 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맘은 함께 하는 듯이 무지 반가운데······.
두어장을 찍을 때쯤······.
그리웠었나보다. 그를 그리워했었나보다. 좀 꺽꺽거리다가 사진을 다시 그 책 속에다 넣어두었다. .

.

.

그리고

.

.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읽던 중 내게 걸린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처음에는 사실 이 글만을 옮겨두고, 누군가 내 방으로 흘러 들어와 좀 긴 듯 하지만 이 글을 읽었으면 했다.
(흘러들어오는 사람? 결국 ‘안토닌’ 이고 ‘토니오’ 겠지)


그리움을 그리움이라 생각하지 않고 덮어두는 사람,
그리움 때문에 생긴 외로움을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른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으며

 

안토닌과 토니오의 식사를 함께 한 것처럼 느낄 거니까, 나처럼······.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마주 서 있다가 두 팔을 벌려 서로를 껴안아 줄테니까, 나처럼······.
곧 맘이 따뜻해지면서 긴 숨 한 번 내 쉬고 다시 일을 시작 할테니까, 나처럼······.

말을 아끼고 싶은 글에 말이 많았다.

 

한 장의 사진! 잘 감상하시길요.

 

--------------------------------------------------------------

 

 



8.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토니오는 내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다. 우리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서로 알고 지냈다.

지난 해 함께 건초를 옮긴 어느 더운 날, 목이 말라 음료수와 커피를 마시면서 그에게서 들은 얘기다.
이제 내가 아는 한, 소몰이꾼 안토닌은 딱 두 번 눈물을 흘린 셈이 된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그렇게 보면 소몰이꾼의 삶은 군인과 비슷하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안토닌은 내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다. 다음은 토니오가 들려준 얘기다.


토니오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에서 안토닌을 처음 만났다.

안토닌은 거기서 소를 치고 있었다.

전에 그 둘은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

 

이 지방의 상세 지도를 펴보면 남쪽 사면으로 작은 네모 표시 아래에 ‘카사 토니오(토니오의 집)’라는 건물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토니오는 이 집을 짓느라고 삼 년을 보냈다. 집이라기보다는 오두막에 더 가깝긴 하지만 말이다.

깨진 바위가 널려있는 사이로 너도밤나무들이 군데군데 서있는 해발 천 미터의 산록에,

그 집은 마치 기대어선 무덤처럼, 혹 테이블의 끝에 웅크려 앉은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비탈의 아래쪽에 피아트 밴을 대놓고 자신의 오두막을 향해 올라가는 토니오를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모습 그것이었다.

세상에서 떨어져 사는 모든 은둔자들이 그렇듯,

길고 여윈 다리에 불가해하게도 무릎을 늘 둥글게 구부리고 걷곤 했다.

오두막 주위에는 양봉장을 보호하기 위해 오랜 전에 돌로 쌓아 올린 사 미터가량의 돌담이 쳐진 우리가 있었다.

매년 5월이면 벌통을 가득 실은 트럭이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와 이 돌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 벌통들을 벌려 놓는다.

벌들은 거기서 두 달 동안 꿀을 만든다.

이 일만 빼면 계곡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양이나 염소, 도마뱀뿐이었다.


5월이면 힐로 나무가 꽃을 피운다네,

변변찮은 관목이지만 흰꽃이 지천으로 필 때면 계곡은 마치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네.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떠올리기도 하지. 토니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두막을 지은 뒤로 토니오는 이 엘 레켄코 계곡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깨져나간 바위, 너도밤나무, 드문드문 보이는 잔디들, 말라 바닥을 드러낸 여울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그린 검은 화폭엔 이 지역의 굴곡진 땅의 모든 것이 마치 고대의 커다란 거북등을 연상시키듯이 표현되어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독수리가 맴을 돌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 희미한 울음소리가 그 마지막 신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처럼 들렸다.
엘 레켄코에서 소를 치려면 반드시 소몰이꾼이 필요했다.

작은 키에 땅딱막한 체격의 안토닌은 낡은 트럭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다.

지천으로 널린 염소 똥을 한없이 밟고 지나갔을 타이어였을 것이다.

글을 전혀 읽을 줄 몰랐던 안토닌은 말하는 방식 또한 제멋대로였다.
그가 ‘엄청난 물’이라고 말하면 그건 폭풍우 때 내리는 억수같은 비를 의미했다.

거무스름한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 옛날 솔로몬이 왕관을 썼을 때의 자부심을 보는 듯 했다. 오랜 동안 소들과만 지내왔던 안토닌에게 ‘카사 토니오’는 잊어버린 옛풍경을 엄숙하게 되돌이켜주는,

사진틀 속의 사진처럼 멋진 집이었다.


둘 모두 서로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벌통이 놓여있던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거나 산록에서 본 것들을 주섬주섬 얘기하며 물을 마시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금 함께 앉아있을 때면 계곡 아래를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뱉곤 했다.

 

하루는 토니오가 감자와 베이컨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안토닌이 우연히 들렀다.

토니오는 그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다.

그저 별 생각없이 초대한 것이다.

어젯밤에 오소리를 봤다고 애기를 건네는 것만큼이나 가벼운 초대였다.

안토닌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 초대에 응했다.

토니오는 데리고 다니는 개 두 마리는 밖에 놔두고 들어오라고 안토닌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안토닌이 그 집에 있는 유일한 방의 문턱을 넘자마자, 그 둘 모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 방안에 한 사람에게는 눈을 감고도 익숙한 분위기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색다른 세계였다.

토니오는 테이블에 접시를 놓고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런히 놓았으며 그 옆에는 잔을, 또 그 옆에는 포도주병을 놓았다.

그리고 빵도 내왔다.

안토닌은 이런 것에 전혀 익숙지 못했다.

어색한 듯 의자에 뒤로 기대어, 동물 우리와 개울, 또 토니오에겐 낯선 이름들에 관해 가끔 한마디씩 떠듬떠듬 말했다.

하지만 마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사람처럼 대체로 아무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토니오가 토마토를 쪼개 그 위에 올리브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밖에는 안토닌의 개 두 마리가 바위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마침내 토니오도 자리를 잡고 앉았고 안토닌은 두 사람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이것만 빼면 다른 모든 접대는 주인인 토니오가 한 셈이다.
맛있는 식사였다.

식사 도중 때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음식을 다 먹고 이번에는 함께 포도주를 마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계곡의 더위는 잔인할 정도였다. 식사가 다 끝났다.

 

이윽고 안토닌은 자신의 모자를 챙겨 썼다.

꼬박 십분간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머뭇거리던

그가 천 페세타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정중하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런! 이제 무슨 짓인가요. 이러지 말아요.

즐겁게 한 초대에 이러면 안돼요. 토니오가 소리를 질렀다.
평생 이런 식사는 처음이었소.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소. 엄숙히 선언하듯 안토닌이 말했다.
집어넣어요. 내 기쁜 마음에 침을 뱉는 격이오. 토니오가 또 고함을 질렀다.
이런 제기랄······. 안토닌이 입 속으로 말을 삼켰다.
토니오가 손을 저으며 안토닌 쪽으로 돈을 밀었고 안토닌은 마지못해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곤 모자를 벗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두 팔을 땅딸막한 몸에서 약간 떼어 벌리고,

왼쪽 손가락에 불 안 붙인 담배를 끼운 채 오른손에는 모자를 들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선 그의 볼에, 눈물이 타고 내렸다.
안토닌을 마주 보고 선 토니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개들이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인은 등을 돌리고 서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소금 병을 찾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엉거주춤 서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가만히 선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 모두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서로를 껴안았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