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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황매산 산행기

by 발비(發飛) 2006. 5. 14.

 

-프롤로그-

 

경남 합천군 황매산. 원점회귀산행

코스: 모산재주차장- 모산재(767m)-철쭉제단-황매평전-황매산정상(1108M)

 

 

-새벽산행-

 

새벽산행을 처음 시작할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더랬다.

멍한 정신으로 캄캄한 산을 오를 때면, 아마 산중턱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새벽산행이 익숙해지면서 즐기게 되었다.

공기가 다르다. 새벽공기속에는 기류가 숨어있다.

온몸을 싸하게 싸고 도는 기운은 단 몇 분동안만 기회를 준다.

그 기류를 느껴야 한다.

 

이번 산행의 새벽기류를 느끼게 한 것은 산이 아니라 동네어귀에서 만난 담배간판이었다.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담배'

그때 본 '담배'는 사이시간이었다.

 

사이시간, 쉬는 시간이라기보다 어떤 일과 어떤 일의 전환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다.

담배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가로등...사이시간에 문득 던져진 선물이었다.

공간 속의 '나'가 아닌 '나'를 포함한 한 장의 그림처럼 평면으로 새겨진 시간으로 기억된다.

 

첫 출발이 그랬다.

 

 

-바위-

 

'황매산' 꽃산행을 온 것인데...이건 뭐야?

바위가 장난이 아니다.

군립공원(?)답게 루프도 없다.

그런데 마침 오늘 난 장갑도 끼지 않았다.

뭐야! 바위를 붙잡고 올라야 했다.

 

온 몸을 손가락끝에 탄력있게 태워야 한다.

손에 힘을 준 순간과 바닥을 다리로 차는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 타이밍을 놓치면 손은 주루룩 미끄러질 뿐이다.

미끄러질 뿐 아니라 어딘가 긁혀버리고 만다.

 

방금 본 '1945년....'

뭐 그 드라마에 나오는 여운형박사의 주장처럼 좌우가 잘 화합을 해야 오를 수 있는 산인 것이다.

한참을 바위와 씨름을 하며 올라간다.

 

그때 옆을 오르던 한 남성

바위 위에 서서 손을 내민다. 잡아주겠다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지.

그런데 나?

"됐어요. 혼자 할께요."

(뒤에 그 남성이 뭐라더라. 참! 나, 한마디에 싹뚝 잘랐대나 어쨌대나...민망했대나 어쨌대나,)

 

바위 산을 오를 때 느끼는 긴장감,  무력함, 무호흡의 상태

20분 정도?

 

 

-일출-

 

바위를 오를 때의 긴장으로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바위가 끝나자 뒤를 돌아본다.

새벽해가 떠오르고 있다. 주위를 벌겋게 물들이며 해가 떠오르고 있다.

 

하루해가 뜨면, 하루를 살다 간다.

해가 때로는 좀 헷갈렸으면 한다.

해도 어지럼증이 있었으면 한다.

 

때로는 하루가 아주 짧게도

때로는 하루가 아주 길게도

나를 위해서 그렇게 뜨고 지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생각했다.

 

"오늘은 너가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러라. 혹 내게 좋은 날이 있거든 아주 오래 옆에 있어줘라."

 

그렇게 내 멋대로 되어주면 어떨까 하는 맘으로 카메라를 흔들었다.

해가 흔들리며 올라온다.

 

 

-먼 풍경-

 

황매산 중턱에서 본 '합천호'이다

마주 보이는 쪽이 경남 산청쪽인 것으로 보면 저 산자락들은 지리산줄기 어디들이겠지 싶다.

합천호 물 위로 산그림자가 곱게 드리우고

산골짜기 골짜기로는 구름이  한뭉치 한뭉치 고르게 잘 나누어졌다.

하산길에 저 구름들은 어릴적 엄마가 홑이불 만들때처럼

잘 어우러져 고르게 편편한게 하얗게 산위를 덮고 있었다.

 

산은 오르는 산과 보는 산 두 가지가 있다.

 

암벽을 타고, 능선을 즐기고, 혹은 럿셀을 하고... 그처럼 산을 오르는 것

마주한 산줄기, 산 아래 동네, 산 옆을 끼고 도는 강줄기 혹은 도로 .. 그처럼 산에서 보는 것

 

이 곳 황매산은 오르는 산도 있지만, 보고 즐기는 산즈음이었다.

 

 

-시작일 뿐-

 

오호라! 맙소사!

철쭉 군락지가 시작되었다.

바위를 오르면서 간간히 피어있는 철쭉들을 보면서 뭔가 힌트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상상외였다.

산등성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넓게 펼쳐진 평원에 놀랐다.

산 위에 그리 넓은 평원이 펼쳐졌을 줄이야. 그 평원에 가득 철쭉이 피었을줄이야.

철쭉군락지에 사진을 찍으러 모인 사진동호회원인 듯한 사람들이 그리 많을 줄이야.

그 분들 중 한 분이 사진의 구도를 맞춰 놓은 자리에 모래 끼어들어

그 사진기의 각도대로 찍어보았다.

누군가를 따라해보고 싶어서리...

쫙 뻗어있는 철쭉밭, 그 너머 산들, 그리고 구름바다

 

이리 소리소문없이 멋져도 되는거야!

소리소문없어라!

 

 

 

 

-말이지-

 

보이는 것이 모두 철쭉이라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분홍빛,

분홍빛 중에서도 가장 촌스러운 듯한 분홍빛이 사방에 있다고 생각해봐라.

그런데 그것의 높이가 말이지.

딱 우리 어깨만하단 말이야.

 

꽃들이 그리 많이 피었는데, 딱 나의 코아래에 있는데.

말이지... 말이지...애닯더라!  향이 없더라.

 

아마 철쭉이 국화라면 우리가 그 속에서 호흡한 시간으로라면 만수무강했을테고

아마 철쭉이 백합이라면 우린 그 안에서 아름답게 딴 세상으로 넘어갔을테고

아마  라일락이었다면 산을 내려와 서울에 왔을때 사람들은 우리의 뒤를 줄줄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니, 철쭉이 향이 없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난 향이 없는 철쭉이...

천지사방이 철쭉이었는데,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다니...

향이 없어 사고를 치지 않은것이니 범국가적으로 감사해야하나... 그건 아닌데.. 그렇기도 하다.

 

 

-소원-

 

능선을 따라 이어진 붉은 띠가 철쭉군락이이다.

산 위에 끝없이 이어진 철쭉때, 그렇지만 딱 이 산 뿐인 붉은 띠이다.

옆산도 뒤산도 앞산도 붉은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붉은 띠를 따라 걸어온 능선길이 참 아름다웠겠구나 싶다가도

문득 생각한다.

내가 온 길이잖아.

그럼

우리가 상상 속에 걷던 꽃밭길, 그 상상 속의 길을 지금 내가 걸어왔던거야.

그런데 난 왜 이것만큼만 좋은거지?

 

어느날 생각하지.

내가 장미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꽃 사이에 있다면, 난 공주가 된 기분일거야.

공주라면 꽃 송이를 한 아름안고 무지 행복한 맘으로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살거야.

단 한 순간이라고 꿈 속처럼 살아봤으면.. 하고 생각하지.

 

그런데, 나 방금 그거 한 거 아니었어.

만약 꿈이라고 생각해봐

꿈 속에서 저 꽃길을 걸었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몇 시간동안이나 걸었다고 생각해봐

그럼 말이지, 평소에 입버릇처럼 떠들었던 것처럼 '더는 소원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맘 속으로 변한 것은 없는거지?

 

그랬다.

말로만 그랬던 것이다.

말로만 그랬지 진정으로 그런 상황이 되었을때 준비하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이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저기 있었단 말이지.

감동받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럼 일생일대 이루어야 할 소원 중의 하나를 이룰 수도 있었던 거였다.

 

이제사 사진을 보니... 오호 통재로다.

잠시 눈을 감고 꿈속으로 다시 가야하겠다.

 

"더는 소원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쳐갈 아름다운 것들을 잡아야 한다. 꾹!

 

 

-그저-

 

철쭉사이에 핀 민들레가 이뻐서 한 컷 했다.

그런데 저 멀리 나무 한 그루도 있었다.

철쭉 천지인 세상에 민들레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렇지만 보지 않으면 철쭉밭뿐인 세상이다.

 

보면 보이는데.

보기만 하면 그 색다름때문에 너무 이쁜데

보면 보이는데

보기만 하면 다른 모습때문에 너무 멋진데

 

모두 철쭉인데.....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

"그냥 무리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게 제일 좋다는 거...  언제나 알려나"

 

민들레꽃이 피었는데....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세상에 내 놓는 거 그것은 너무 자신을 과신하거나 못마땅해서 그러는 거니까..."

 

유채꽃씨가 잘 못 날아와서 철쭉군락지 사이에 피었는데,

흑장미로 피고 글라디올러스로 피지 않았는데,

민들레꽃이 철쭉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울며 불며 한들,,, 결국은 눈만 팅팅 부을 것이다.

 

아름다운 민들레꽃이었다.

온통 분홍철쭉밭옆에 핀 노란 민들레꽃이 바람에 몸을 맡겼다.

유채꽃이 송이 송이로 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이즈음에서 잘 난척을 하고 싶다.

 

"나 노란 민들레꽃 봤다. 철쭉 앞에 아주 작은 키로 서서 대장하는 노란 민들레꽃 봤다.

아무나 보는 거 아니거덩! 이쁜 사람만 보는거거덩!"

 

--------근데 민들레 아닌거 같다^^::--------

 

 

-행복-

 

 할까?

 

바위틈에 저리 피어있으면 행복할까?

참 이쁘게도 피었네.

한송이도 아니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많이도 피었네.

난 보기에 이뻤고, 맘이 짠했는데, 행복할까?

어쩌나 싶었다.

 

 

-뒤-

 

새벽에 올랐던 철계단과 바위능선이다.

새벽에 올랐던 덕분으로 많은 산꾼들을 피할 수 있었다.

가파르고 무서웠던 길이었는데, 지났다.

 

뒤라는 것!

이미 지난 것이라는 것!

 

내꺼 아니야.

 

지나간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그 곳에 있는 사람의 몫이다.

지금 '뒤'때문에 아직도 "힘들어" "무서워"하면서 떨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처럼

지금 평탄한 길에서 바위능선을 보고 있으면서도 몸이 두개로 분리되어

아직도 바위능선을 타고 있는 것이 된다.

불가사의다.

 

몸은 이미 그 곳을 지나와 평탄한 내리막길을 가고 있으면서

아직도 바위능선을 타고 있는 몸으로 있다는 것.

 

그건 아니잖어... 그렇지? 맞어? 틀려? 얼른 대답해보시지.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에필로그-

 

황매산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아주 만족스런 산행을 했다.

꽃이라기보다 산 위에 숨어있는 넓은 평원이 더욱 만족스러웠다.

지금, 철쭉이 요란하게 핀 봄도 좋겠지만, 사방이 고르게 옅은 갈색일 가을도

하얗게 눈이 덮힐 겨울도 평원이라서 참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근처에 있는 '영남알프스' 제왕산과도 닮았고

월출산과도 닮았다.

봄이 아닌 계절에 한번 다시 찾고픈 산이다.

아주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차가 올라가는 황매평전까지 차로 올라가

숨을 헐떡이지 않고 아주 편안히 바람을 많이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저 덤!-

 

무지막지한 칼라를 보고 온 것이다.

빨간 해, 하얀 구름, 파란 하늘, 분홍철쭉, 초록풀밭,

 

그리고 하산하는 길에 만난 나무들이다.

나무들에게서 색을 걷어내어보았다.

색들을 걷어내니, 실루엣이 보이고 빛이 보였다.

 

실루엣...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

 빛... 변하지 않는 나의 동반자

 

아름다운 곳을 보고 와 난 색을 걷어내고서야 들뜬 맘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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