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절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진지함
이 책을 만난 첫 느낌은 진지하다. 참 진지하다.
1984년엔 책도 진지했었다.
책에도 표정이 있다니, 마치 젊은 날 투사가 나이를 먹어서도 그 눈빛만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책꽂이에서 꺼낸 책에 긴장감이 돈다.
한 장을 넘겼더니 책의 가장 자리가 노랗게 퇴색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파고 드는 중.
퇴색 되어가는 중.
마치 우리의 팽팽했던 마음이 퇴색되어가는 것을 들키는 듯 싶어 쓰다듬어 본다.
종이의 질감이 거칠다.
결 하나 하나가 보리싹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그 위에 깔린 활판 인쇄.
잉크가 짙고 옅고 마치 수작업한 물건을 보는 듯
책에도 흐름이 있다.
1984년 판인데 말이다.
1984년이 그리 오래 전 일인지......
다음 장을 넘겨본다.
헌책이라 주인이 끼워 둔 뭔가보다 했었다.
한지에 인쇄된 판화그림, 자르는 선까지 그려놓았다.
이 시집을 사는 이들에게 머리맡, 책상맡에 붙여두라는 것이다.
판화그림이 선명하다
등을 돌리고 흐느끼는 듯한 남자
엉켜서 울고 있는 가족
그땐 그랬었다.
울 일도 많았고, 목숨을 걸 일도 많았고, 싸울 사람도 많았고, 참고 견뎌야 할 일도 많았었다.
그것을 누르고 달래고, 혹은 일어나게 하게 덤비게 하는 힘이 책에 있었다.
책을 읽으며 분노하고 정리하고 말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의 끝은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고, 국가였고, 현재였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팽팽함 긴장감.
노동의 새벽' 이 시를 소리내어 읽어본다.
그렇지 싶지만, 이젠 그 시가 피를 거꾸로 솟게 하지 않는다.
목을 메이게 하지는 않는다.
그저 한 시절을 돌아보게 할 뿐이다.
"그때는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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