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존버거 쟝모르]말하기의 다른방법

by 발비(發飛) 2006. 3. 26.

 

 

말하기의 다른 방법

존 버거 쟝 모르 작, 이희재 옮김

 

이들 콤비가 만든 책 중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다.

말하는 방법, 그것도 말하는 다른 방법... 말을 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의 하나를 일러주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이 책의 구성, 특이하다.

 

1부- 장 모르가 사진가로서 체험한 것들을 사진과 함께 글로 옮겼다.

사진이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 이용하는 사람의 관심이 만나는 장이 곧 사진이라는 것.

2부-사진에 대한 이론서,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 그 자체의 의미를 짚어가는 것

3부-설명없이 150장의 사진, 이 사진을 보면서 맘껏 상상

4부-3부의 사진이 이야기하려던 방식이 무엇인지 되짚는어 가는 과정

 

'존 버거'의 해박하고 선이 굵은 문장과 '쟝 모르'의 섬세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글들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책을 산 지 몇 달만에 이리 저리 읽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아래에서 주절거린 것들은 그저 사진이나 사진 보는 법에 대해 도움이 될 듯 싶어

밑줄을 그어 둔 것을 옮겨본 것이다.

이 책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진의 모호성처럼 앞 뒤를 잘라버리면 개인의 기억이나 경험에 따라 다른 길로 빠지게 된 격이

다.

 

 

제1부. 첫번째이야기

 

"내 소를 사진찍는다. 나한테 동전 한푼 안내고 내 소를 꿀꺽 하시겠대!"

 

작가는 우시장에서 소를 찍는다.

소의 주인이 한 말이다.

동전 한 푼 안내고 소 한 마리를 꿀꺽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은 소 한마리를 꿀꺽하는 것이지.

영원히 소를 소인채로 꿀꺽하는 것이지.

보아뱀처럼 말이지.

우시장의 소는 소일뿐이지. 그렇지만 사진작가의 손에 담긴 소에는

소의 큰 눈이 있고, 냄새가 있고, 소털의 끝의 바람이 담기지.

소가 살았던 세상까지도 함께 꿀꺽하는 것이지.

송두리채, 온전한 채, 냉동보존된 채 꿀꺽하는 거이지.

 

"혹시 아침에 일찍 잠이 깨더라도 놀라지마,

이웃집에 어린소녀가 있는 데 앞을 보지 못하지만 호기심이 많거든,

새로 온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올거야."

 

쟝모르가 인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가 묵은 숙소에 눈먼 소녀가 산단다. 그 소녀는 호기심이 많아 낯선 이가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을 알아보려고(?) 새벽부터 창가에 얼굴을 들이민단다.

쟝모르가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 있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보이지 않는 눈을 창에 대고 있다.

짐승들의 소리를 내자 소녀는 웃는다. 반응을 한다.

알아본다는 것은 그가 낸 짐승의 소리를 짐승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짐승의 소리를 통해서

그 소녀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착한 아저씨를 찾아내는 것이다.

소녀는 알아보았다.

그래서 소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웃는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다.

볼 수 없어도 알아 볼 수 있다.

그래 알아볼 수 있다. 소녀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알아볼 수 있다.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다. 끊임없이 알아 볼 수 있다고 주문을 외고 싶었던 사진이다.

 

"사람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야,. 머리를 찍으려면 머리전체,그리고 어깨까지 찍어야 하거든 얼굴 일부만 나오게 하지 말고(......)

제 내 증손자들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겠군."

 

알프스에서 살고 있는 마르셀이라는 노인

그가 키우는 소의 눈을 찍어 보여주었을 때 마르셀이 한 말이다.

그 소의 이름을 정확히 맞추면서 일부분을 찍지 말고 전체를 찍으라고 말한다.

마르셀, 자신의 소가 눈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깨끗이 씻고 와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하면서 상반신의 사진을 원한다.

자신의 증손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있도록... 상반신을 찍기를 원했다.

상반신의 사진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그는 상반신의 어떤 사람이기를 원한다.

누군에겐가 명확한 어떤 것이기를 바란다.

눈 하나 입하나 어느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인 자신을 봐주길 원한다.

나를 찍으라고 주문한다면 난 상반신 전체를 찍으라고 할 용기가 있을까?

없다!

난 나의 상반신을 찍으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어쩌면 좀 더 멀리 서서 전신을 요구할런지는 몰라도

상반신을 찍으라고 허리에 손을 얹을 용기는 없다!

그건 당당함이니까....

 

셀프포트레이트

 

자신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찍히는 자의 공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셀카라는 것을 많이 찍는다.

왜곡이 가능한 셀카.

타인이 자신을 찍을 때는 왜곡할 수는 없다. 내가 그에게 의도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나의 사진을 내가 찍을때는 난 나를 왜곡한다.

얼짱각도로 각을 주고,

오른쪽과 왼쪽의 장단을 파악하여 난 나를 왜곡한다.

왜곡한 나를 나를 믿고 나로 만든다.

쟝모르가 말한다. 어느 날 텔레비젼 프로에서 자신을 찍은 것을 보면서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왜곡되지 않는 자신을 만났다고.

내가 원하여 만들어낸 나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나의 모습을 만난 뒤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디카에서 사진을 지운다.

지운 사진은 왜곡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진짜에 가까운 것일런지도 모른다.

진짜를 지우고 만들고픈 나를 남기는 것.

내가 찍은 나의 사진은 미래의 나를 남기는 것이다.

되고픈 나를 남기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닐지언정 미래의 나일 수 있기를... 지금 남은 사진이 말이다.

 

"사진을 찍어도 좋지만, 단 '일이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줘야 돼요."

 

어떤 한 사람을 정의할 때, 그 사람이 하고 있던 일은 그 사람의 전체가 되기도 한다.

가스통이라는 나뭇꾼의 아내는 남편의 사진이 없다고 쟝 모르에게 사진을 찍어줄 것을 원했다.

가스통,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문한다.

가스통이라는 사람은 나무를 자르고, 베어 쓰러뜨리고 운반하는 일을 혼자서 하는 사람이다.

 

쟝 모르가 찍은 그의 사진에 담긴 그의 입과

튀어오르는 톱밥은 사람을 설명하지 않고도 가스통을 만난 듯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산 속에서 나무를 하던 나뭇꾼은 나무가 없이 얼굴전체만 찍은 사진에서도 숲의 향이 난다.

나뭇꾼 가스통의 얼굴에서 나무의 그림자가 보이게 하는 것, 사진작가!

 

사진 찍을 수 없는 것

 

쟝모르는 말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때도 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 전쟁 혹은 산행, 뭐 그런 ....

찍으면 특종감이지만, 사진기를 열 때가 아니라 사람을 구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종군기자출신들의 자살률이 놓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좋은 사진을 건지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찍었다.

그 사이에 구했으면 그 사람은 살았을런지도 모른다. 뭐 그런 갈등때문이란다.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어떤이는 역사나 사건의 기록을 위해 사진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는 사진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것에우선하는 이도 있다.

쟝모르는 그 순간 사진기를 꺼내지 않는다 했다.

 

사진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시인이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하면서 쓴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라는 사람도 그렇다.

자신의 생 혹은 타인의 생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활자를 두드리는 ......

급박한 상황을 저장하느라 상황자체를 연장시키는 경우도 있다.

가난과 비극의 절정을 맛보기 위해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 시인도 있다.

 

시를 쓸 수 없는 것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것

...

혹은 그것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

 

그때 그때 달라요.

 

제2부

 

"이성은 사물의 차이를 존중하고, 상상력은 사물의 유사성을 존중한다."-by shelley

 

흐음~~~~~~그러네.그렇군!

그 둘 중 어느 구석으로 콱 머리를 쳐박고 싶다.

중간자 말고....

 

"모든 사진은 모호하다. 모든 사진은 어떤 연속체에서 꺼내 온 것이다." 

 

사진은 찰라이다.

우리는 모두 움직이고 연속한다.

그런데 사진은 연속하던 한 부분을 잘라놓은 것이다.

앞도 뒤도 없이 딱 한 찰라.

그러므로 모호하다.

원인도 결과도 없으므로

원인도 결과도 없으므로 사진의 앞과 뒤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사진이 예술인 이유, 바로 그것이다.

이 모호성.

 

"그림은 자신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시간을 자기 안에 담고 있다.

그림은 자신이 표현되는 동안의 시간과는 별개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사진은 육안으로 식별할 수없는 빠르기로 거의 순식간에 받아들인다.

사진에 담긴 시간은 그 사진이 보여주는 대상의 순간이다.

그림안에 있는 시간은 균일하지 않다.

화가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림의 시간은 인간이 판단하는 가치에 따라 생겨난다.

사진에선 시간이 균일하다,

어떤 부분이건 균일한 시간동안 균일한 화학처리를 받는다. 노출시간도 같다."

 

'알바이신의 고양이들"이라는 책을 쓰신 정세영사진작가는 그의 책에 삽화를 그려넣고 쓴 말이 생각난다.

사진은 그 순간 그 곳에 있었던 일만을 담는 것이지만,

그가 그린 삽화는 그 순간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서 자신이 담고 싶은 것을

그 곳에 있었으면 하는 것을 더 담아 놓을 수도 있어서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사진작가의 말이라 잘 와 닿았던 말이다.

그림은 아침에 그 곳을 찾는 새와 저녁에 그 곳을 찾는 새를 한 곳에다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는 데 그림의 어느 것보다 더욱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릴 수 있다.

그것에 비하면 사진은 평등하다.

사랑하는 어떤 곳을 강조할 수는 없지만, 편애하지 않게 되는 것이 사진이다.

하기사

요즘은  디카에서 접사기능이 있어 편애를 하기도 하지만, 그림보다야 고른 사랑을 줄 수 있다.

이 책을 쓴 때와 지금,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그림이라는 것이 흐름을 따라 사람의 손끝에서 진화하듯

사진이라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끝으로 진화를 하긴 하는구나 싶다.

하지만 그 시간성은 즉시성은 어쩔 수 없는 사진만의 고유영역이다.

노출시간을 늘이든 줄이든

조리개를 열든 닫든

어쨋든 한 장의 사진안에서는 고르고 평등한 빛을 받는 것,

 

사진은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인용하는 것이다.

 

번역이 아니라 인용이다.

이 책에서 가장 와 닿는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번역이나 감상문이 아닌 인용문이다.

인용문에 각주를 단 것이 사진이다.

숨길 수 없는 출처가 분명한 것.

인용문은 새로운 지식 생산의 근거가 되겠지.

그림이 되고 수필이 되고 시가 되고... 사진은 인용문이다. 

 

모든 사진은 역사에 기여할 것이다.

 

모든 예술은 역사에 기여한다.

사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역사에 근거하여 탄생한다.

그렇지만 사진이 가장 역사와 근접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이 이입되어 필름에 담길 수는 없기때문에.

그저 그 필름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받는 순간 해석이나 감상이 들어가는 것이지 필름 자체엔

그저 객관적 사실일 뿐이니까

객관.

역사에 객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사진은 객관적인 눈, 마른 눈으로 세상을 담아둔 것이다.

지금의 객관들이 사진 속에 담겨 역사가 된다.

나, 너,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된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봄으로써 다른 사물이나 사건들의 모습이 함께 실려온다.

 

사진의 모호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

모호성의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보는 이의 경험에 좌우된다.

한 장의 진달래 사진을 본다.

진달래의 붉은 빛을 본 적이 있는가

붉은 피를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진달래 붉게 핀 길을 누군가와 걸었던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 장의 진달래 사진을 보는 것에 가장 중요한 밑천이 된다.

진달래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뼈아픈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

멋진 산행길을 기억하게 하기도 한다.

그 기억은 그 때 함께 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되고

그 사람과의 첫 인연을 생각하게 되고

첫 인연의 시기에 또 함께 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한 장의 그림에서 수 많은 상상을 하게 되지만,

그림보다 사진을 통해서 난 줄줄이 딸려드는 기억들을 즐긴곤 한다.

 

어떤 모습을 알아보려면 다른 모습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한다.

( ....) 하나의 영상은 다른 영상으로 침투한다.

 

한 여자아이가 모래사막을 걷고 있다.

나무 등짐을 가득지고 맨발로 모래바람 사이를 걷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난 그 사진을 보고 그 아이에게는 오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 아이의 오빠는 있었었지만,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아이는 오빠를 대신하여 나무등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 제 집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미식 사진작가가 불가리아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서 내가 한 생각이다.

사진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사진에서는 그저 여자아이가 나무 등짐을 지고 걷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이

나에게 저장되었던 나의 영상이 그 사진을 만나 나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사진은 개인의 기억과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이 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에 기록된 그 모습을 통해서

또 그것이 부추긴 가독성, 비가독성이란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한다.

 

가독성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무엇을 찾을 수 있다.

읽어낼 수 있는 사진에서 난 나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의 기억은 재생되면서 좀 더 길어진 녹화시간을 가지게 된다.

 

비가독성

-사진에서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없다.

그 곳이 어디지?

뭘 하는 것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진을 만나기도 한다.

그 사진은 내게 저장된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까지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될 것이다.

다시 읽어낼 수 없었던 그 장면을 만난다면, 난 생각할 것이다.

"나 저거 본 적있어."

내가 가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사진에 있다.

 

의미 심장한 사진은 모습에서 길게 인용해온다.

여기서 말하는 길이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의 확대를 뜻한다.

 

사진을 즐긴다.

사진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느 날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보니,

책꽂이 한 켠에 차곡 쌓여진 사진에 관련된 책이 몇 권이 되는 것을 보고 놀랬다.

아! 내가 사진을 보기를 즐겨하는구나.

사진작가의 포토에세이집 몇 권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내가 좋아하는 몇 몇 작가,

그리고 책을 사긴 했지만 덮어둔 작가,

그 차이는 무엇일까?

멋진 칼라와 기법을 사용했음직한 사진을 보면서

"멋있다."하고 한마디밖에 할 수 없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사진 한 장을 보고서 연속극을 쓸 수 있을만큼 나만의 사연이 풀어져 나오는 사진이 있다.

사연이 구구절절이다.

한 장의 사진에서 온갖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진 넓은 공간을 가진 사진

...그것이 의미심장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제3부

 

늙은 여인은 가공의 인물이다.

여러분이 마주치게 될 모호성은 작품'이해'의 걸림돌이 아니라

이 작품이 단 몇 분동안이라도 늙은 여인이 자기 삶에 대해 품고 있는 속마음을 뒤쫓으려 할 때 다시 우리가 그것을 뒤쫓기 위한 조건이 된다.

기억은 냉정하게 끝없이 앞으로만 전진해야 하는 플래시백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억은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는 자리다.

그 자리는 그것을 창출하고 확대하는 주관성의 입장에서 보면 연속적이지만

한 순간에서 보면 불연속적이다.

 

사진만이 3부 전체에 있다.

분명 이것 저것의 사진들이다.

하지만 간간히 놓여진 털실이라든가, 나이 든 여자의 손이 한 사람의 길을 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사진들은 나에게 한 여자의 것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연결고리로 잇는 것도 사진을 보는 나이다.

분명 사진은 어떤 연속적인 장면의 찰라였지만

찰라들을 내가 하나 하나 엮어 다시 연속 재생시키고 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게 한다.

한 노파의 사진을 보면서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고 나의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고

현재 나의 모습과 비교하게 되고... 하나로 만들어진다. 나!

 

제4부

 

'사진들의 모호성은 마침내 진실이 된다.'

경험의 맥락아래서 반성에 의해 사진에 드러난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갖는다.

사진들이 드러내는 세계는 고정되고 추적가능하게 된다.

사진에 담긴 정보에 감정이 스며든다. 모습은 한때 살았던 삶의 언어가 된다.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세희]침묵의 뿌리  (0) 2006.04.04
[뭉크]카를 요한의 봄날  (0) 2006.03.27
[존 버거 쟝모르] 제7의 인간  (0) 2006.03.23
다시 열면서  (0) 2006.03.11
[에드바르드 뭉크]뭉크 뭉크  (0) 2006.01.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