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1974년
존 버거 글, 쟝 모르 사진
존 버거, 쟝 모르 두 사람, 그들 콤비!
사진과 글의 콤비.
어느 누구에도 기울지 않는 한 사람의 것처럼 고른 책이다.
2000년대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듯이.
1970년대 독일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등의 육체노동자의 1/4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이 책은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그리스 등 개발도상국 출신의 이민노동자가
그들의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유럽의 선진국으로 노동이민을 갔다.
그들 노동이민자들의 삶에 밀착해 마치 존 버거 자신이 마치 노동이민자인 듯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자신이 가난해서 떠난 고향과 가난을 피해 들어앉은 부자나라에서의 사는 이야기가 이 책안에 있다.
존 버거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에서 이 책의 주제를 '부자유'라고 정의했다.
꿈,,,, 그리고 부자유
그리고 쟝모르의 사진과 자신의 글은 서로가 독립된 관계임을 밝혔다.
쟝모르 스스로 수년간 작업한 사진과 존 버거 자신의 글은 대개의 경우
서로의 흐름대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난 이 점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간대이지만, 다른 공간에서 같은 대상들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도구로 그 대상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들 두 사람의 결과물을 한 권의 책에 묶었다
책 한 권이 마치 한 사람의 작품인 듯 어울려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십년간 같은 작업을 한 것이다.
세상 누구나 그런 인연 한 사람쯤 가졌으면 한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그런 인연을 가졌으면 ......
그저 생각나는 대로 혼자서 밑줄 그어둔 곳을 옮겨본다.
제7의 인간
헝가리의 시인 아틸라 요제프(1905~1937)
네가 이 세상에 나서려거든
일곱 번 태어나는 것이 나으리라
한 번은, 불타는 집 안에서
한 번은 얼어붙은 홍수 속에서
한 번은 거칠은 미치광이 수용소에서
한 번은, 무르익은 밀밭에서
한 번은, 텅 빈 수도원에서
그리고 한 번은 돼지우리속에서
여섯 아기들이 울어도 충분치 않아 :
너는 제 7의 인간이 되어라 한다.
네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할 때면
너의 적에게 일곱 명을 내보여라
한 명은 일요에 일을 쉬고
한 명은 월요일에 일을 시작하고
한 명은 돈을 안 받고 가르치고
한 명은 익사하면서 수영을 배웠고
한 명은 숲을 이룰 씨앗이 되고
한 명은 원시의 조상들이 보호해 주는 사람
그러나 그들 모두의 책략도 충분치 않아 :
너는 제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네가 어떤 여자 하나를 찾고 싶거든
일곱 남자를 보내어 찾게 하라
한 명은 말만 둗고 자기 마음을 내주는 자
한 명은 제 몸조심만 하는 자
한 명은 몽상가를 자칭하는 자
한 명은 치마 밑으로 여자를 만질 수 있는 자
한 명은 단추와 여밈 고리에 훤한 자
한 명은 그녀의 비단수건을 밟는 자 :
그들이 그녀 주위에서 파리떼처럼 윙윙거리게 하라
그리고 너는 제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네가 글을 쓰고 또 그럴 힘이 있다면
일곱 명이 시를 쓰게 하라
한 명은, 대리석 마을을 건설하는 사람
한 명은 자면서 태어난 사람
한 명은 하늘의 해도를그리고 외고 있는 사람
한 명은 글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
한 명은 산 쥐들을 해부하는 사람
둘은 용감하고 넷은 현명하지만 :
너의 제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이 씌어진 대로 되면
너는 일곱 명을 위해 죽어야 한다
한 명은 요람에서 젖을 빠는 자
한 명은 빈 접시를 내던지는 자
한 명은 가난한 사람들의 승리를 돕는 자
한 명은 산산조각 날 때까지 일을 하는 자
한 명은 달만 마냥 보는 자
온 세상이 너의 묘비석이 되리니 :
너는 제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존 버거는 이 이야기들의 출발을
헝가리 시인인 '아틸라 요제프' 의 '제7의 인간'이라는 시로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제7의 인간
부재한 인간이다.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 여섯 조각의 나.
그 사진 뒤에 내가 되고픈 없는 나.
제7의인간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는 것은 결국은 이 생에서의 구속 혹은 감옥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질식하고 말지.
이 시인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단다.
존 버거는
70년대 유럽노동이민자들의 이야기 앞에,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 '제7의 인간'이라고 붙였다.
-잠시 딴 소리-
얼마 전 본 영화 '우작'이 갑자기 생각났다.
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우작'을 다시 보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우작'을 생각하지 못했었고,
'우작'을 보면서 이 책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금 이 책을 정리하면서 '우작'이 생각난다. 무엇때문일까?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주절거림을 잠시 미룬다.
도시로 떠나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영웅이다.
(......)
그는 그들의 잘난 척할 권리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의 성공의 증거물인 돈과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 도시로 떠나는가?
삶을 위해서 도시로 떠나는가?
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성공?
삶?
어느 것도 아닌 그저 삶의 당위성을 위해 산다.
그렇게 되어야 나의 삶이지 하는 그 어느 선, 그 선을 그어놓고 거기에 맞도록 살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것의 기준은 타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그저 삶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먼 것.
그래서 난 삶의 당위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도시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 그 사람의 삶의 질이 자신이 정한 그 선이 아니더라도, 잠시의 귀향은 그 선에 맞출 수 있다.
그 잠시 동안은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서울 친척들이 사 온 화려한 색깔의 색연필세트처럼 그 분들도 그랬으니까.
며칠은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당위성을 가질 능력은 되는 것이다.
그걸 지금은 안다.
나더러 며칠만 누구처럼 성공의 선위에 살아보라면 난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내 삶 전체의 당위성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내 삶의 당위성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지만서도.
아마 누군가를 만난다면 아주 짧은 시간만 만날 것이다.
며칠은 가능하니까......
치명적인 정체는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닮아있다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숨쉬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 곳이 시골이여서가 아니라 내가 의지하지 않아도 움직여지는 곳이기 때문에 떠난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도 살아갈만큼 익숙한 곳이라 떠난다.
도시라는 곳은 익숙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이다.
도시라는 곳은 항상 업데이트되는 곳이다.
업데이트되어 익숙해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환경이 내게 주어진다.
새로운 것들은 숨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시킨다.
그런데말이다.
난 아직 꿈꾼다.
중학교2학년때 나의 꿈,
농사꾼의 아낙이 되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하는 것.
뚝뚝 떨어지는 땀을 맛보는 것.
그것이 삶의 증거가 되는 것.
아직도 난 그 또 하나의 꿈을 꾼다.
땀의 역동성.
어느 날 그는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결정은 실제로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났을 때에야 그것이 알려진다.(......)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그는 결심을 한 게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난 회사를 그만둘 때의 생각이 난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은 도농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회사간의 이동도 마찬가지이다.
말할때까지도 100%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만 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전해 들은 말들이 다시 내 귀에 돌아오고서야 난 안다.
내가 결심하였음을... 아마 그 말이 내 귀에 돌아서 들어오지 않았다면 난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을 없었던 일처럼 넘기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것
확신에 찬 일은 없는 것
그렇게 넘겨진 일들의 그 뒷처리는 다음 일을 하고 있을 때에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난 그 뒷처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민이 가지고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심과
자기 집에서 준비 해 온 앞으로 2-3일 동안 먹을 음식, 자신의 자존심, 호주머니 속의 사진들,
그의 짐꾸러미, 그의 옷가방이다.
그 중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버리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앗 나의 경우를 고백하자면,
결심과 음식과 짐꾸러미 옷가방이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자존심과 앳띠게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남았다.
만약,
지금 다시 남겨야 할 것을 다시 고르라면, 난 결심과 짐꾸러미라고 말한다.
적어도 비나이다식 교과서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근데.....
어디갔지?
내 짐꾸러미... 결심...
인간 (남편, 아버지. 시민, 애국자)으로 재생되려면 어던 이민이든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아무런 장래가 없어서 그가 떠나왔던 고향으로
부모님에게 난 인간이다.
부모님에게 난 그저 이소영이다.
부모님에게 난 딸이다.
고향?
내가 나로 재생되려면 난 내가 사용하던 모든 프로그램을 휴지통에 버리고
제어판의 프로그램까지 모두 제거해버리고
달랑 하드 하나만 들고 있으면 된다.
그것이 286이든 386이든.... 팬티엄이든... 그저 난 작동되는 컴퓨터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낯익은 환경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한다는 것은 힘이 든다.
내가 이 책에서 한 구절을 꼽으라면 이 구절을 꼽는다.
내용적인 측면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턱하니 걸린 말을 고르라면 이 구절이다.
세상은 정상적이다.
세상은 어떤 규칙대로 잘 움직이고 있다.
세상은 법칙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그런데
정상적인 나는 세상을 사는 것이 버겁다.
난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때로 하면서 말이다.
익숙하기 그지 없는 세상,
다 알겠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세상.
그런데 그것들 전체가 하나로 내게 굴러오는 것, 그 허걱거림, 그 숨막힘.
정상적인 것들이 정상 궤도로 나에게 굴러오는 것.
얼른 난 몸을 낮추고 그들과 함께 공이 되어 굴러가야할 포즈를 잡는 것.
번번히 때를 놓치는 것
앗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 이미 지나가고 없는
또 오는구나
준비하고 있어야지 하면 이미 어떤 이들이 세상의 하나로 모양이 바껴버린 ...
휙 또 지나가는...
지나가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요란하군.
그 사이 공은 엄청 커져버렸군.
정상적으로 둥근 세상을 정상적으로 굴러오는 공. 저기 또 온다.
그는 새로운 언어의 단어를 스무 개 배웠다.
그러나 처음에 그가 경악을 했던 것은, 그가 말했을 때는 그 말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는 커피를 청했다.
그런데 그 커피라는 말이 바텐더에게 의미하는 것은
그가 커피를 청해서는 안되는 바에 와서 커피를 청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여자도 배웠다.
그가 사용했을 때 여자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그가 음란한 개새끼라는 뜻이었다.
언어의 불투명함을 꿰뚫어 보는 일은 과연 가능한가?
소통-
소통의 이야기를 하면 정말 눈물이 난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아주 솔직한 맘의 고백이다.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
소통되는 세상을 단 하루만 살아보고 죽는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내가 커피라고 이야기하면 커피라고 알아듣고
상대가 커피라고 이야기하면 내가 내가 생각하는 커피를 갖다주어도 커피인 그런 세상.
난 여자라고 말하고 상대는 나를 여자라고 아는 세상에 살기를 꿈꾼다.
소통되는 단어를 사용하고 사는 것.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것.
그저 반쯤은 벙어리로 살아도 답답할 것이 없는 그런 세상.
종일 허기가 지도록 떠들어도 내가 한 말은 공중분해되고
종일 귀가 아프토록 들어도 내 가슴에 그의 말은 한 마디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세상, 포기한다.
기꺼이 포기한다.
단 하루...............소통되는 삶을 아직 꿈꾼다.
曲肱之樂(곡굉지락)- 論語 述而篇 -
飯疏食飮水 (반소사음수)
曲肱而枕之 (곡굉이침지)
樂亦在其中 (낙역재기중)
不義而富貴 (불의이부귀)
於我如浮雲 (어아여부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나니
옳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는 뜬
구름일 뿐
소통만 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즐겁지 않을 일이 없다.
그대 아직도 꿈꾸는가?
넵!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뭉크]카를 요한의 봄날 (0) | 2006.03.27 |
---|---|
[존버거 쟝모르]말하기의 다른방법 (0) | 2006.03.26 |
다시 열면서 (0) | 2006.03.11 |
[에드바르드 뭉크]뭉크 뭉크 (0) | 2006.01.21 |
[쟝 모르] 세상끝의 풍경 (0) | 2006.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