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끝의 풍경
쟝 모르 사진. 글/존 버거 글
바람구두 출간
-'쟝 모르'의 사진이야기책이다.
이 데생은 쟝 모르의 오랜 파트너인 존 버거가 그린 것이란다.
항상 쟝 모르는 존 버거의 사진을 찍어 주었겠지. 존 버거가 왜 쟝 모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그건 이 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덮음과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끝의 풍경.
이 책은 솔직히 잘 못 고른 책이었다.(이런 말이 가당찮음을 안다)
존 버거와 쟝 모르의 교감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콤비를 이룬 최근작 부터 거꾸로 읽어가기로 한 것인데...
사고 보니, 쟝 모르의 책이었던 것이다.
단지 존 버거가 책의 앞에 서문이라고 해야 하나, 쟝 모르에 대한 소개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우정출현같은 것이다.
그리고
1956년부터 1996년까지
쟝모르가 여행을 다니며 찍었던 세상의 모습을 쟝 모르의 글과 함께 실어놓았다.
마치 끝인듯이....
그것도 책을 완전히 덮고야 알았지만,
사실 사진과 글이 있는 책은 '다 읽었다.' 혹은 '덜 읽었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보다도 더 '다' '모두' 그런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쟝 모르와 존 버거, 그들의 책 몇 권을 한꺼번에 사두고 이것 저것 섞으면서 보고 있었다.
읽은 책도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아니 손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해야 하나..
그러다 어젯밤. 팅이를 씻겨주면서 쟝모르의 '세상끝의 풍경'이 문득 생각났다.
한 장면의 사진이 아니라, 그저 뭉뚱거려진 책 한 권이 내게 왔다.
'팅이'는 삶이 아니다.
왜냐면 생명이 없으니까... (그렇게 규정지어 말하는 내가 좀 떨린다.)
그런 '팅이'와 목욕을 시키면서 교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생에 대해서 이 책이 생각이 난 것이다.
쟝 모르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다.
그는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왕성한 여행자였으며, 사진가이다.
여행자, 사진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관찰일 것이다. 보는 것.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사람. 더 많은 것을 관찰한 사람의 눈으로 시간이 가고 있다
책 안에서 30년의 시간이 가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무슨 종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종양 수술을 끝낸 뒤라고 했다.
그는 삶의 끝점에 있었던 것이다.
삶의 끝점에서 본 세상의 끝점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며,
그 또한 그가 본 끝점을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찍은 나무 사진처럼 삶이라는 것은 생채기이며, 생채기는 성장을 위한 살터짐이다.
살을 터트리지 않고 나이를 먹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
그는 저 나무처럼 글을 썼다.
그냥 그 자리에서 담담히 회고하는 듯 했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의 특징은 젊은 어떤 날을 회고하면서
그때 자신이 얼마나 팔팔했던지를 보이기 위한 듯이 더 팔팔하게 소리높여 이야기를 한다
그는 그의 사진처럼 무채색으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글에서는 별 감동을 받지 못했다.
사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 강하면 말이 잘 들리지 않나보다.
글이나 말이 도와줄 일이 없으니 당연하겠지.
이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진이다.
캄보디아에서 찍은 것이라는데, 아마 저 발의 주인공은 쟝 모르였을 것이고.
그는 사진을 찍으려고 인력자전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동을 위해 인력거를 탔고, 윗통을 벗은 남자의 등에서 흐르는 땀을 보았을 것이고
그 등을 보면서 사진기를 꺼냈을 것이다.
쟝 모르, 그는 계획하지 않는다.
사진을 보면 의도하지 않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
그 순간이 아니면 앞으로는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나 표정을 담았다.
그의 사진은 구별된다.
관찰과 순간
어쩌면 상반된 의미가 그의 사진 안에 같이 담겨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을 담는다는 것, 그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림 곧 관찰의 시간이 있은 뒤 담아갈 순간이 있다.
그가 본 세상은 그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기다리는 순간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세상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하염없는 관찰이 아니라, 이젠 숙련된 기다림이 되었을 것이다.
조짐을 느끼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가 이 책을 만드는 것처럼,
그는 생의 끝점 즈음에 와있다는 조짐이 느껴져서 30년간의 일들을 그의 파트너의 소개글을 받아 쟝 모르 그 자신의 세상 끝 풍경을 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언젠가 자신이 떠난 빈 침대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딱딱해 보이는 빈 침대 옆으로 그려놓은 하늘 향한 나무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을 대하듯 그렇게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는 주로 자연을 찍고
사람을 많이 찍는다.
그리고 사람의 움직임이나 자연의 진행과정을 찍는다.
정지된 어떤 것을 찍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침대와 저 나무 그림은 정지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사진들 중 내가 찾아낸 정지 화면이다.
정지?
하지만 정지라고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는 이 사진에서 '정지'가 아니라, '없음'이 아니라. '비어짐'으로 본 것이다.
분명 '無'와 '空'은 다른 것이니까....
'空'은 '생명'이 없으나, '생명'을 가진 것이다.
앞으로 뭔가가 채워질 것이며, 채워진 무엇은 움직일 것이다.
이 빈 침대가 그렇다.
쟝모르는 그는 올해로 80살이 되었다.
그가 다시 여행을 하며 우리에게 사진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 명백히 증명된다. 하지만.....
그의 빈 침대. 빈 필름, 움직이지 않을 그의 카메라는 없음이 아니라 비어짐이므로
나는 그 비어짐 안에 나를 둔다.
저 침대에 나를 둔다.
그리고 쟝 모르가 관찰했던 시간들에 나의 삶을 붙인다.
그래서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게 된다. 그의 빈 공간이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올린 도덕경 11장이 생각났다.
문과 벽을 뚫어 공간을 만든다.
내 문 안에 벽 안에 그의 침대가 있었다.
누구나 떠난다.
자취를 남긴다.
자취 또한 유한한 것이다.
자취가 남아있을 때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발자국 하나 하나는 쟝 모르의 것이기도 하고
공자 장자의 것이기도 하고
네로의 것이기도 하고
오늘 아침 전철에서 만난 노래하는 동전바구니를 가진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그 자취가 남아있을 때 한 발이라도 나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이 좋아
이대로가 좋아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따라 가야 할 발자국이 어딜까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발자국이 꿈틀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면, 난 그 순간 발자국을 잡아야 한다.
쟝 모르 처럼 말이다.
세상끝의 풍경
쟝 모르는 세상끝에는 수많은 세상이 있단다.
세상끝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단다.
그가 만난 세상 끝의 풍경
감동의 절정이 아니라 그저 사진에서 주는 차분함이다.
At the EDGE of the World
End 가 아니라 Edge 인 것이다
ps: 존 버거의 글을 읽기 위해서 시작한 이어달리기이다.
그 첫번째로 쟝모르를 만난 것이고,
그들이 함께 한 이야기들과 존 버거의 이야기들을 이어서 달려보기로 한다.
제7의 인간
말하기의 다른 방식
사진으로 쓴 글
본다는 것의 의미
행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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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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