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19
지리산
중산리-칼바위-로터리산장-천왕봉-장터목산장-제석봉-유암폭포-중산리
-어둠 속을 오르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지리산의 커다란 덩치
내가 여길 또 왜 온 것일까?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
토요일 퇴근 후 일찍 잠을 자야지, 쉬어야 해, 쉬어야 한다면서 이불속으로 들어갔던 내가
배낭을 매고 밤새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밤새 뜬 눈이었다.
캄캄한 지리산을 길따라 오른다.
숨이 차고, 다리가 띵띵해져옴을 느낀다.
지난 주 계방산 산행의 여파로 아직 엉덩이도 아픈데, 알 밴 종아리가 풀리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그 어둠만큼 알 수 없는 내 맘을 추적한다.
돌멩이가 발에 걸리면 내 맘에 들어앉은 돌멩이 때문일까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면 내 맘도 나뭇가지가 걸린 것일까
어둠 속에서 기우뚱하기라도 하면 내 맘도 중심을 잃어 기우뚱거리는 걸까
캄캄한 산을 오르면서 산이 마치 나인 듯 끊임없이 나를 갖다댄다.
어둠 속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으니, 산이 나인 줄 내가 산일 줄 착각한다.
산과 내가 다른 것임을 볼 수 없다.
다만 울퉁 불퉁 튀어나온 것만 느끼며 같은 것이라 착각할 따름이다.
정말 내가 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나도 산이다.
능선만 길게 이어진 산은 산행하기가 편하긴 하지만, 그 산에서 우리는 말한다.
"산을 타는 맛이 없어. 너무 심심해. 동네 뒷산이잖아!"
돌과 나무와 흙이 다양한 각으로 얽히면서 보여주는,
모든 경우의 수들이 모여있는 험한 산을 오르면서 우린 만끽한다.
"멋지다! 바로 이 맛이야." 경이롭다 한다.
야간 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착각이리라
발끝에 닿는 아슬함이 마치 나일 것이라는 그런 착각을 한다.
어둠은 가득함이기도 하고 텅빔이기도 하다.
산길을 오르는 어둠은 텅빔에 가깝다,
오직 발의 감각으로 허공을 걷는 듯한, 끝도 보이지 않는 마음길을 따라 걷는 것과 같다.
사방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앞사람과 뒤사람의 호흡만이 간간히 들려온다. 그저 나만의 길이 아니라
누군가도 갔던 길이며 올 길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고 자신 안에서 걷는 야간산행이다.
한동안 그렇게 걷다보면, 곧 밝아질 날이 기대된다.
난 어떤 모습의 산일까?
나만큼 힘들고 까탈스러운 산이다. 헉헉거리느라 가슴이 따갑다.
-시간이 되자 밝아오다-
어김없이 해가 뜬다.
산에서 맞는 일출은 아주 길다.
검은 하늘끝으로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건 색의 변화다.
흑백사진 너머로 약간의 색을 나타나면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다.
이제 해가 뜨면, 사방이 보일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보일 것이고,
내가 가고자 하는 봉우리가 보일 것이고 내가 왔던 길이 보이는 것이다.
헉헉거리던 숨이 어느 새 가지런하게 가슴에 놓인다.
동쪽에 떠오른 해처럼 가지런하게 내 가슴에서 고르게 진동하고 있다.
콩닥 콩닥
그 소리마저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손바닥을 가슴에 대어보아야 한다.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상나무 물갬나무 자작나무들이 마른 가지로 남아 하늘을 향해 날을 새우고 있다.
가지들이 세운 날 뒤로 내가 올라야 할 천왕봉이 보인다.
뒤를 돌아다보면 끝도 없는 첩첩이 이어진 미끈한 산들이 도열(이건 도열이라고 밖에 말 못한다)
앞과 뒤이기도 하지만, 가깝고 먼 거리이다.
혹은 내가 가야 할 길과 돌아온 길이기도 하다.
산은 한가지이지만, 내가 선 땅을 중심으로 산은 이런 저런 산으로 바뀐다.
세상으로 내려가면 '산'은 다르다고 난 우기게 된다.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산이 험해졌다가 부드러워졌다가 하룻사이에 마구 변하는 것이라고 우기게 된다.
사진마다 나무 한 그루씩을 세워두었다.
내가 저 나무가 된다.
나를 곳곳에 세워두고 어디에서도 항상 먼, 그리고 항상 가까운
변하지 않는 시선을 두기 위한 나의 나무 한 그루씩 지리산 곳곳에 세워두었다.
너무 멋지게 생긴 나무들이라 민망하긴 하지만서도.
-흔적-
어느 시에서 본 적이 있다.
흔적이란 언젠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빈자리로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제석봉 고사목단지.
작년보다 재작년에 비해 많은 고사목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닳았다.
이제 고사목단자라고 쓰여진 팻말을보고서야 고사목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고산의 초원처럼 느껴질 뿐이다.
흔적
그들이 한때 울창한 숲이었던 흔적, 고사목
고사목단지였다는 흔적으로 넘어져 있는 마른 나무
이제 쓰러진 나무마저 비바람에 햇빛에 풍장되어가고 있다.
풍장이다.
바람에 비에 햇빛에 들짐승에 날짐승에 보시하도록 몸을 맡기는 풍장이 치뤄지고 있었다.
또 어느 사진작가가 말했다. 흑백으로 사진을 찍으면 감정의 색이 살아난다고.
풍장을 치르고 있는 고사목 단지를 흑백렌즈를 갖다댄다.
어린나무가 싹을 틔우고, 하늘을 향해 길게 뻗고, 초록이 울창하고
바람이 불어도 서로의 가지와 잎으로 견고히 막아내던 나무가 살아난다.
고사목 뒤로 그들 나무의 과거가 보인다.
고사목단지에서 색을 드러내니, 나무들이 살아났다.
나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가기가 수월한 것이다.
사라져서 틈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흔적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그날에는 색을 드러낼 필요도 없이 없는 시간이 된다.
산 자의 기억속에 남아, 산자의 생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흔적없이.....
고사목은 아직은 세상에 자리를 하고 있다.
나도 자리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유암폭포-
천왕봉에서부터 이곳까지는 정말 전쟁이었다.
아이젠을 하고도 골짜기는 얼어붙었고, 그 위로 눈이 쌓여있다.
차라리 눈이면 아이젠 발로 꽂듯이 디디며 한 발 한 발 나갈 수 있다.
나의 아이젠 네발짜리.
여섯발짜리 아이젠을 신은 동료의 도움을 받았다.
발이 많을수록 미개한 동물인데, 이 곳에서는 발이 많을수록 안전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
길이 모두 얼음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얼음내리막길을 내려온 것이다.
집에 와서 보니, 가장 험악한 순간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찬 순간의 사진이 없다.
사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느낀다.
한 겨울이었다면 얼음이 내 발밑에 있을리 없다.
봄이 오고 있으니, 눈은 녹았고, 아직 가지 않은 겨울은 녹은 눈을 얼게 만들었다.
아직 겨울은 가지 않았고 , 벌써 봄은 와 있다.
그 위를 걷는 우리는 아이젠을 신고도 미끄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온 몸을 긴장하고서 내려왔다.
소용돌이 치는 계절에는 누구나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풀포기들도 숨을 죽이고 긴장하고 있을 것이고,
나뭇가지에 움트려 대기하고 있는 싹도 촉수를 세우고 긴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봄에 딱 이 코스로 산행 때 함박꽃, 수수꽃다리나무를 만났던 곳이다
지리산 이 코스 중에 가장 야생화가 많은 핀 곳인데,,, 빈가지들이 얼음 위에 서 있었다.
올해 여름이 되면 아니 봄이 되면 꽃 구경하러 다시 이 코스를 오를 것이다.
그땐 얼음이 아니라 꽃을 경계하며 산행을 할 것이다.
문득 흔하디 흔한 여뀌꽃이라도 보고 싶다.
하지만 지리산은 봄과 겨울의 기운이 전쟁을 치른다.
지리산에 살아있는 것들은 숨을 죽이고 그 전쟁을 지켜보고 있다
혹은 전쟁터를 지나가고 있다.
폭포수
얼고 녹고 계절의 틈새, 곧 오늘 내일 한다.
전쟁의 막판이 되면,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대세라는 것이 있다.
대세라는 것은 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흐르는 것이다.
이제 강력히 저항하는 저 얼음 폭포처럼 크게 균열이 가고, 곧 굉음과 함께 떨어질 것이다.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물이 될 것이다.
우린 여름쯤에 이 물에 발을 담그고 시원타고 할 것이다.
같은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저 커다란 문으로 스스로 들어가려는 듯...
들어가서는 다시 나오지 않겠다는 듯,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이 비장하다.
-본다는 것의 의미-
얼마전에 존 버거라는 작가의 [본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을 읽었었다.
많이 어려워서(?) 아무튼 잘 읽히지는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잘 읽은 듯한 맘을 가지게 했던 ......
해가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이다.
물갬나무 아래로 오래 전에 사태가 났던지 벼랑으로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벼랑 밖으로 발을 내밀었던 뿌리는 언제 말랐던지 보이지 않았고.
고드름이 뿌리의 자리를 대신하여 뻗어있었다.
물갬나무는 자신의 가지보다도 더 튼튼한 뿌리를 가지게 되었다.
추운 겨울 내내 아주 든든한 뿌리를 가진 것이다.
고드름뿌리는 나무를 위해 사방을 정지시켜 놓았다.
겨우내 바람이 불어도 비가와도 물갬나무는 위태해 보이지는 않는다.
겨울 한 철이지만 호위병을 둔 것이다.
뿌리를 두어 단단해 보이는 거대해보이는 물갬나무다.
천왕봉을 오르면 몇 그루의 물갬나무를 더 보았지만, 이 보다 더 당당한 물갬나무는 없었다.
우리에게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같은 물갬나무를 보지만, 어쩌면 더 위태롭고 안타까운 물갬나무를 보았지만,
본다는 것은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나라는 인간을 최전방에 두는 것이다.
나라는 몸 전체를 렌즈로 삼아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나의 온 몸이 렌즈가 되어 하나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산을 오르는 기쁨은 온 몸의 수고로움을 뛰어넘는, 본다는 것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를 본다.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나는 나를 렌즈로 삼아 산이라는 거슬림없는 세상을 본다.
산이 보여주는 삶을 본다.
산을 관통하고 있는 바람과 해의 질서를 본다.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본다.
보이는 것을 본다.
보는 것에 일등공신 나의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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