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림도 설탕도 없이 맥심 오리지널 커피 두 스푼 가득,에소프레스 필이다.
-커피잔에다 계피나무 껍질 한 조각 푹 담궜다.
아주 진한 삼키면 온 몸에 카페인의 기운으로, 계피향으로 반짝 빛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한 모금 삼킨다.
쓰다
고소하다
쌉살하다
마치 떤 감을 한 모금 베어문 듯 입안과 입안의 피부조직이 분리되었다.
그래, 분리되었다
분리를 원했던 것 같다.
만족한다. 에스프레소 필의 커피......
세가지색 제 2편 화이트/평등. 1994
폴란드 남자미용사인 카론은 아내 도미니크한테 이혼을 당한다.
이혼후 카론 완전 거지가 되어 빗으로 피리를 불며 부랑자. 짐가방에 실려 폴란드로 돌아간다.
죽을 고비 몇 번 후 우유부단하던 카론, 인간이 변한다. 돈을 벌기위해 혈안이 되고 또 돈을 번다.
이건 폴란드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넘어가는 과도기여서 가능하다.
거부가 된 카론, 시체를 구해 자신의 사망신고를 하고 그 유산을 전처인 도미니크에게 상속한다.
장례식에 참석한 프랑스 여자 도미니크, 슬픔에 겨운 모습을 보고 카론 안도한다.
그날밤, 카론은 도미니크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이혼사유였던 성적불만족 상태를 뛰어넘는다.
카론과 도미니크 진정으로 화합이 된 것이다.
카론, 자신의 사망이 허위였음을 밝히려 검찰로 가고, 그런 카론을 멀리서 보는 도미니크,
그가 감옥에서 나올때까지 기다리며, 폴란드에 정착하겠다고 한다.
나에게는 스토리라기 보다 이미지로 보는 영화였다.
그리고 부제가 붙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되었다.
'평등'이라는 부제가 없었다면, 아마 난 이 영화를 심드렁하게 보았을 것이다.
친절하게도 부제 붙어서, 울타리를 쳐주지 그 안에서 놀 수 있어서 편하게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같지 않다. 다름.
다름이라는 것은 평등한 상태의 다름일 수도 있다. 차이.
차이라는 것은 고른 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선이 다른다. 그리고 잣대도 다른다.
그럼 불평등이라는 말은 다름이라던가 차이를 보는 기준섬의 시각이다.
기득권, 기준점 프랑스 도미티크
피기득권 피기준점 폴란드 카론
그들의 화해주체는 프랑스나 도미니크에 있지 않고
화근내 펄펄 풍기며 쫓아온 폴란드나 카론에게 있었다.
평등이라고 하니 평등이다.
평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놀라고 하니 평등이 보인다.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평등이 팍팍 오지 않는다. 그게 평등일까?
하얀 눈이 고루 내리던 카론이 버려졌던 폴란드 어느 시골마을이 진정 평등한 곳이었다.
그 곳은 하얀 눈이 고르게 내리더구만...
카론의 연기가 아주 멋졌다.
Souvlaki-When the sun hit
세가지 색 제 3편-레드/박애. 99분 1994
한 편의 휴먼 다큐를 보는 느낌이었다.
발렌틴, 대학생이며 패션모델로 활동한다. 오귀스트 퇴역판사 판사퇴역 후 어둔 집안에서 이웃들의 전화를 도청하며 살고 있다. 오귀스트 법대생, 여자친구를 무지 사랑하는 그러나 실연당한다. 그 외...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사람으로도, 목소리로도... 사람들은 발렌틴의 눈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고, 목소리들은 퇴역판사의 도청음안에서 들을 수 있다.
차분하게 자신의 일을 잘 꾸려나가는 발렌틴, 남자친구의 과도한 지킴이 본성때문에 답답하지만, 그저 그것이 애정이라고 받아들이는 정말 천성이 착하고 맑다.
착하고 맑은 것은 그런 자신때문에 그것은 마치 유리같아서 세상을 그대로 보기도 하지만, 상처를받으면 곧 깨어져 버리기도 한다. 다치기도 한다. 정반대의 퇴역판사, 그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서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스스로 알 수 없다. 같은 유리인데 오래동안 닦지 않아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그림자를 통해 그저 추측할 뿐이다. 이웃집에서 그의 도청을 알고 집 유리창에 던진 돌,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그에게는 소통의 창도 되었다.
이 영화는 두번 보았다. 어제 새벽에 한 번 보고, 오늘 저녁에 또 한 번 보고...
처음 영화를 보면, 스토리에만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두 번 영화를 보면 대사나 배경에도 눈이 간다. 오늘 한 번 더 본 것은 발렌틴과 퇴역판사의 대화를 한 번 더 들어보려고 .... 퇴역판사가 이웃집 전화 내용을 듣고 또 듣는 것처럼, 닫힌 자신의 집안에서 세상의 본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세상을 들어보고 싶었다. 내 방에 앉아서....
두 번째 본 그들. 교감. 사랑안에 교감이 포함되는 것인지. 교감안에 사랑이 포함되는 것인지 사랑은 본질이고 교감은 사랑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는 것인지. 교감이 본질이고 사랑이 교감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하고 싶으냐? 교감을 하고 싶으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교감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발렌틴의 패션쇼를 보고 난 뒤 차를 타고 돌아가는 재판관과 발렌틴의 얼굴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육체과 정신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지만, 꽉 끼어서 돌아가야 움직일 수 있지만, 마치 서로에게 업을 진 듯이 정신과 육체가 서로에게 빚을 갚고 있지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그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십계 시리즈, 짧은 필름 시리즈. 색 시리즈를 남기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저 긴 이름을 언제나 쉬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부를 수 있겠냐마는, 언제나 저 긴 이름을 보고 또 보고 두드릴 수 있겠냐마는, 그는 휴머니스트다.
난 휴머니스트를 좋아한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보다 따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잘 생기고 섹시한 사람보다는 따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따뜻한' 이 아니라 '따듯한' 이라고 꼭 말해야 한다. 정말 따듯하니까
가슴만 따듯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성도 따듯해지는 영화들이었다. 그는 다큐를 찍듯 그저 관찰자로서의 세상을 읽어나가고 있는 듯 했다. 만들어나간 것이 아니라,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여 준 것. -사실 이런 면에서 두번째'화이트'는 나에게는 좀 겉돌았다. 내가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니깐.
이 영화들은 아마 한 두 번쯤은 더 보면서 그리고 또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시각변화가 있었는지 다시 찾을 것 같다. 일련의 그의 영화들을 그 때도 밤을 새워 몰아 보겠지.
그의 전집을 읽듯이. 만 24시간을 꼬박 그의 영화를 보면서 지냈다.
지금, 그가 세상에 없다는 없이 참 이상하게 받아들여진다. 인간을 이야기 했던 그도 그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간에 밤새워 그의 영화를 보고 있는 어떤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에스프레스 필의 커피 한 잔이 더 필요하다. 이번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
'보는대로 映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피아니스트 (0) | 2006.02.04 |
---|---|
[영화] 세브린느 (0) | 2006.01.24 |
[영화]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0) | 2006.01.22 |
[영화]은밀한 여인 (0) | 2006.01.17 |
[영화]블루 (0) | 2006.01.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