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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대로 映畵

[영화]블루

by 발비(發飛) 2006. 1. 16.

 

 

 

세가지 색 제 1편- 블루/자유(1993)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티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

 

-잠시 딴 소리-

 

도대체 뭘 알고 있는걸까?

도대체 모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첫 느낌은 이 두가지 질문에서 시작했다.

 

블루를 보았다.

1993년에 개봉을 했다니, 개봉할 때 보았으니, 12.3년전에 보았던 것이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오직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줄리엣 비노쉬의 참 이상하게 이쁜 그 얼굴 뿐이다.

지금도 이 컴퓨터를 닫고 나면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만 생각날 수도 있다.

 

제목이 블루이다.

그렇지 빨강 파랑 하양이다. 그냥!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이고, 알고 있는 것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그것이 이 영화를 본 첫 느낌이다.

 

-잠시 딴 소리 끝-

 

1. 나의 '블루'이야기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색깔, 블루

내가 왜 그 색을 좋아하는지 언제부터 좋아하는지 난 모른다.

 

아무튼 난 블루를 보면

차분해지는 듯 하기도 하고,

숨이 쉬어지는 듯 하기도 하며

또한 숨이 막히는 듯 하기도 하다.

내게 희노애락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주는 색이 바로 블루이다.

 

내가 이것이 바로 파랑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은 아주 오래 전 2월의 바다를 보고 나서이다.

2월의 바다는 어느 계절보다 차다.

12월보다도 1월 보다도 더 차가운 바다가 바로 2월의 바다이다.

이때의 바다색은 블랙에 가까우면서 코발트빛이 숨어있는  파랑색이다.

 

이 파랑색을 만나면,

난 내 속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더러운 숨들을 내 보내기도 하고,

또 내 숨을 막을 듯한 맑고  찬 기운이 내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기도 하다.

나에게 파랑은 구속과 해방 모두를 가진 색이다.

 

2. 영화 '블루'이야기

 

난 이 영화의 제목이 그저 '블루'인줄 알았더니. '블루' 옆에 '자유'라고 붙어있다.

자유?

나의 숨막힘과 숨트임이 자유라는 것인가?

자유! 그게 자유라는 것이구나.

 

오늘은 그냥 줄리만 따라가보기로 한다.

줄리는 세계적인 작곡가의 아내이다.

남편과 딸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오직 자신만이 존재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나의 존재는?

존재하는 나과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같은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못하다.

 

 

존재와 부재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재와의 동거는 자신을 옭아매는 형틀이다.

부재하는 것을 그리워하고, 함께 한다는 것은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 감옥은 부재의 원인이 되는 그들, 

저 세상에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어쩌면 더 가혹한 감옥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영혼의 차이.

영혼은 벽을 깰 수 없다. 다만 벽을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벽을 지나갈 수는 없지만, 벽을 깰 수는 있다.

이 세상은 깨고 지나 다닐 수 있는 현존하는 세상이다. 그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줄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이 곳이다.

 

줄리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부재와 동거하던 중, 새로운 존재를 만나게 된다.

 

자신을 짝사랑했던 남자, 

남편의 아이를 가진 남편의 연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창녀.

길 가에서 남편의 곡과 비슷한 리듬의 리코더를 연주하는 걸인.

 

  

 

그들과의 새로운 만남과 만남 사이에 완충제, 블루

 

수영장의 물, 크리스탈 장식품, 딸의 사탕. 그리고 옛집의 방.

블루와 만나는 순간 들리는 블루와는 정반대되는 평화로운 음악소리.

 

줄리가 블루 안에서 잠시 머물다 나올 때 마다 새로운 현존의 것들이 그녀를 기다린다.

 

이때 파랑은 잉태의 색이다. 내포의 색이다

파랑을 거쳐 존재를 만날 때마다 한겹씩 벗겨지는 줄리.

담담히 천천히 벗어나가는 줄리.

남편의 연인이 남편의 아들을 가진 것을 알고 나서 그의 부재에 대해 완전히 해방된다.

 

 

 

새로운 사랑. 그것은 분명 새로운 사랑이 아니었지만, 진정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반짝이는 파랑들.

반짝이는 파랑들 안에는 줄리의 눈물도 함께 한다.

파란 비즈처럼 눈물이......

 

 

줄리의 눈에서 흐르는 파란 눈물은 자유의 눈물이다.

자유의 눈물이 영원한 자유를 주지는 않겠지만, 이제 어떻게 자유를 찾아가는지

그 요령은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시 딴 소리-

 

저 여자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새 연애를 하네.

그 남자 참 이상하구만, 저렇게 멋진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다니.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아주 못된 놈이구만.

창녀을 연민하다니,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언제는 쥐가 불쌍한 척하며 창고에 그냥 두더니, 고양이를 그 곳에 넣다니... 정말 잔인하군.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집을 내어주다니....

 

십 몇 년전에 난 분명 그런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에 자유가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것이고, 블루가 뭐 어쨌다고 ...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 때의 내가 그랬던 것이다.

나름대로 귀엽네...

세상을 참 밀착시키고 살았구만... 교복 반듯하게 다려입은 아이같구만... 좀 딱딱하지만서도...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이고, 알고 있는 것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오래 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그동안의 삶이 내 생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알아채게 되기도 한다.

엄청 많은 연애소설을 읽고 난 뒤 길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경찰서에 갔다오고 난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뭔가 죄목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등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산을 보여줘야 할 것처럼 생각되고...

뭘 그런 경험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그 동안의 삶이 어땠는지, 그 때와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서 몸에 밴 것이다.

몸에 밴 냄새가 다른 곳을 볼 때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들은 냄새 제작중이다.

 

 

-다시 딴 소리 끝-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봤다고 생각하고 미루고 미뤄두었던 영화를 다시 보면서 기분이 좋다.

 

내가 파랑에 집착하는 것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자유를 원하는 것.

내 속에서 강한 자유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는 것,.그것은 반가운 일이다.

 

난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니까...

아직도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아직도 난 삶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니까...멋진 일이다.

이럴 때 난 내가 가장 대견하다.

스갱아저씨의 염소처럼, 갈매기 조나단처럼,

 

아직도 난 뭔가를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블루------- 자유란다.

내가 미치게 좋아하는 바다색이 자유란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그랬다.

 

그럼 레드는 뭐라고 말할까?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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