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윤학님의 산문집 [환장]이다.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사서, 한꺼번에 읽는 버릇이 있다.
[알바이신...]과 거의 같이 끝났다.
아주 가볍다.
내용이 아니라, 책의 무게가 아주 가볍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 손에 말아질 정도의 크기이다.
두께는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그런 듯 하다.
산문집
특히나 시인의 산문집 그것은 수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난 모르겠다
이것도 수필이겠지. 그런데 시인이 쓴 것은 수필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산문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산문, 그것은 운문의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시인 이윤학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인지 다른 책인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생에서 시로 쓰지 못한 것을 산문으로 쓴다."
그 말보다 절실한 시인의 말을 찾을 수 없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시인의 소리이다.
시인이 시를 사랑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환장]이라는 산문집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시인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소소한 일들이 가슴에 까지 절대로 소소할 수는 없는 것이지.
소소한 것들이 아직도 시인의 가슴에 담아 바글거리고 있었던 것이지.
그 애를 끓이다가 조금씩 내 놓은 듯 한 이야기기들.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한 이야기들.
아니 솔직한 이야기들이라고 믿고 싶다.
하도 요즘은 글과 사람이 달라서 글에 속고 사람에 속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의심하면서 읽기까지는 싫다.
내가 읽는 모든 책들이 가장 솔직한 책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특히 이윤학시인은 그냥 보는 시인이라고들 한다.
뭔가 짜내는 시인이라기보다 그냥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 그 결과를 본 그대로 쓴다고들 한다.
그래서 응시의 시인이라고 하던가... 뭐라든가..
아무튼 이 산문집도 좀 그렇다.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구경하는 듯 담담하다.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흥분하지 않는다.
아주 담담히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양새가 마치 도를 튼 사람의 분위기다.
아주 짧은 글 하나를 그대로 옮겨본다.
2003년 10월 3일부터 소파생활자가 되었다. 사무실 귀퉁이 천소파에서 침낭을 덮고 자기 시작했었다. 집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집, 밖이 있어도 나갈 수 없는 밖, 내 몸속 폐에 뚫린 구멍까지도 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햇볕이 들지 않는 사무실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스텐드 옆에 놓인 철쭉 화분은 1년 내내 잎사귀를 달고 있었다. 지난 늦은 봄엔 딱 한 송이 꽃을 보여주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지속되었다.
나는 요즘 들어 '섬광'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섬과. 다시는 오지 않을 '섬광의 순간'을 채집하고 있다. 나는 벙어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소파생활자 전문
거의 가장 짧아서 옮겨놓은 것이다.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독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그는 소파에서 잠을 자면서 최대한 민감상태로 스스로 몰아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민감한 상태.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벙어리를 자처하는 시인.
그런 거 아닌가?
이 글을 읽으면서 시와 산문이 뭐가 다른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생에서 쓰지 못한다고 운운했던 말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시의 소중함과 자신의 맘. 둘 다 모두를 너무 사랑하는가보다.
어떤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두 가지를 위해 촉수를 세우고, 섬광을 채집하는 벙어리를 자처한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과거의 이야기라면,
그의 어린 시절이야기를 읽고 있다보면.......
그는 (그가 들으면 뭐랄지 모르지만) 참 나와는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의 나약함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난 항상 우긴다.
"뭐 나도 겪을 건 겪었어" 하면서,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거저 먹은 인생이라는 것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나같은 삶을 그저 먹은 인생이라고들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그 댓가로 나이가 꽤 먹어서도 단단해지지 못해 버벅거리는 것.
그래서 공평한 것.
이 책을 권한다.
감동의 물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잔잔히 웃으면서 혹은 좀은 가라앉으면서, 또 혹은 얇은 숨을 뱉으면서....
그리고 좀은 또 안도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에 그 많은 책들,
그 책들 사이에서 드러나보이기 위한 자신이 쓸 수 있는 화려한 수식어들을 모두 접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스스로 치워버리고,
손가락으로 흙바닥에다 찬찬히 써내려가고 있는 듯 하다.
딱 그런 산문집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그저 좀 맘이 그럴 때, 울적하기도 하고, 뭔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런 맘을 떨치기도 어정쩡하고, 붙들고 있기도 어정쩡하고, 남의 일처럼 미뤄버리고 싶을 때
한 번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난 그렇게 읽었다.
[환장]
제목과는 정반대의 책이다.
ps: 그가 잡으려는 섬광이 이런 것이라면....
섬광
황동규
내 중세 정원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번개
하늘과 땅을 용접하는 보라 섬광에
낙원이 잠깐 윤곽만 나타났다 없어진다
그건 한낱 광휘에 불과하리라
몽매에 혹해 있는 이 어리석은 자는
그러므로 평생 깨닫지 않으리라
얼마 후 당도한 천둥 소리, 조바심이었을까?
하늘 마룻장에서 누군가 발 구르는 소리;
섬광을 본 꽃과 가지들 다 재가 된
숯덩이 정원에 쏟아붓는
폭우; 이래도 낙원이더냐?
이런 섬광을 잡는다?
시인이라면 잡았으면 하고 같이 원해 줄 섬광이고
인간적으로는 잡지 않았으면 하는 섬광이네.
역시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은 시인과 사람으로 나누지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내 생각으론 그가 아프던 말던, 섬광을 잡았으면 좋겠다.
시인이니까.... 미안하게도 그는 시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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