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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가을선물

by 발비(發飛) 2005. 11. 10.

늦잠을 잤다.

머리를 감을 시간도 화장을 할 시간도 없었다.

세수만 겨우하고, 모자쓰고 안경끼고 전철역으로 뛰어갔다.

내가 뛰어서 땅이 울린건가? 나뭇잎들이 한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늦지만 않았다면, 나뭇잎비 좀 맞고 갔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뛰었다.

전철안에서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김현의 평론집을 꺼내 읽었다.

재미있었다. 여러 시인들의 시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그리고 김현이라는 분이 골라놓은 구절들,,

평론의 대가라고 하는 분이 골라놓은 시를 읽는다는 즐거움, 마치 옆에서 골라준 시를 읽는듯한 마음으로, 당연히 몰두했다.

 

지난 봄, 바비킴의 노래를 들으며 전철역을 지나쳤듯,

오늘 아침도 전철역을 지나쳐버렸다.

이상하다, 하며 고개를 드니 동대문운동장이다.후다닥 내렸다.

-내심 좋았다. 바비킴의 음악을 들을때처럼 내가 재미있어하는구나 싶어서 좋았다.

 

거꾸로 가는 전철을 바꿔타고,

그러니까 한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문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창에 비친 내 모습,,,

모자 위에  뭔가 얹혀 있었다.

손을 뻗쳐 만졌다. 바스락거린다. 나뭇잎이다.

벚나무 잎이 내 모자위에 걸터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내 머리위에 떨어진 나뭇잎일것이다.

모두들 나를 보았겠지?

아무도 내 모자위에 붙은 나뭇잎을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을 때도

전철에 앉아 있을때 내 앞에 서 있던 사람들도,

아무도 내 머리위에 얹혀진 커다란 나뭇잎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었다.

순간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웃고 만다. 웃음이 나는 일이다. 우린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웃음나는 일이다.

 

내 손으로 내려앉은 나뭇잎이 이쁘다.

노란 잎에 가장자리는 붉다.

붉은 가장자리가 가시처럼 까칠까칠한 것이 손맛이 좋다.

들고있었던 김현의 책에 나뭇잎을 끼워놓았다.

이미 말라버려 제대로 마를까 싶지만, 마른 잎을 내 책에 담아둔다.

 

고독,

가을에 고독,

누구나 섬인 도시에 나에게 내려앉아 말을 건 나뭇잎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오늘, 가을이 내게 준 선물 하나를 챙긴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김현님의 책에 항상 있을 것이다.

이 세상분이 아니신 그 분과 내가 만나는 그 공간에 가을 나뭇잎이 항상 함께 할 것이다.

 

나를 즐겁게 만들어준 그 분의 책은 항상 나뭇잎과 함께 기억될 듯 싶다.

때로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남됨을 느끼지만, 반드시 위로 받을 곳은 있다는 것, 참 다행이다.

 

고맙다.

나무 바람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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