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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그가 말했다. 7

by 발비(發飛) 2005. 9. 23.

그가 말했다.

 

"비극만이 영혼의 상태를 고양시킨다."

 

 

 

너무 슬프다.

드라마도 슬프고, 소설도 슬프고, 시도 슬프고, 영화도 슬프고.

모두다 슬프다.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생각난다.

생각 난 김에 딴 짓 한 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 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한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 방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 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얹은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슬프다고 내가 말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조차 슬프게 보인다고 내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비극만이 영혼의 상태를 고양시킨다."

 

정말?

정말 우리의 삶에는 비극만이 영혼을 고양시킬 수 밖에 없는걸까?

그렇단다.

갈등의 여지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렇단다.

 

비극의 종류를 찾아본다,

 

-육체적 고통-

 

몸이라는 형이하학에 근거하여 비극이라는 형이상학으로 이동되는 비극이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맞물려있다.

 

 

-정신적고통-

 

애는 좀 복잡할 것이다.

형이상에서 형이상으로의 이동. 평행이동이다.

 

평행이동의 특성상,

간단히 한 방에 흔적도 없이 해결할 수도 있지만,

또 합일점을 만나기가 무지 어려운 것이 이 평행이동이다.

 

주체는 두가지이다.

문제의 주체가 나일수도 있고, 남일 수도 있다.

 

문제의 주체가 나일 경우 머리가 아픈 일이지...

 

가시나무새...."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생기는 고통..."

 

내 속의 수많은 나를 하나의 나로 합일 되는 순간

고통은 끝나고 비극도 끝이 나는 것인데

바로 인간이 비극적인 동물인 것은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일 것이다.

 

이 때의 답은 단순화 작업!!

손바닥 뒤집기다.

그런데 손바닥 뒤집는 것이 장난이 아니란 것이지...

내 속에서 나만이 간직한  비극은 타인이 모를 수도 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적어도 내 안에서만 비극으로 그치고 남이 보기엔 즐건 삶으로 보일 수 있다.

잘만 감추면 전이의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내 속에서 빨리 치유가 되지않고 곪아 들어가면,

]생각지도 않게  큰 수술을 받기도 해야한다.

 

문제의 주체가 내 몸이 아닌 다른 몸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경우

 

오지랖의 문제가 된다.

 

오지랖을 넓어, "내가 해결해주리라" 외치며 나선다면

남의 비극도 나의 비극!

 다행히 그 비극이 조기에 해결될 경우 난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오지랖이고 뭐고 난 남의 삶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의 경우

나는 지금 타인보다는 나은 모습이지만,

언제가 타인의 문제가 해결될 경우, 난 왕따가 된다.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은 악덕인간이 되는 것이니까...

이 경우에도 시간이 지나 깊이(?) 반성하고, 낮은 포복으로 다시 타인을 대하면

다시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는 있다. 시간이 약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꽁한  인간도 있다)

 

내가 외면을 했는데, 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그나마 적당한 거리도 없어지고 아주 멀어지고 만다.

난 타인이 보기가 민망하고

타인은 나를 보면 원망할테니까...

 

우리는 이런 비극속에 영혼을 성장을 기다리는 인간이다.

 

점심 식사 후 졸음에 겨운 주절거림이다.

 

그가 말했다.

"비극만이 영혼의 상태를 고양시킨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고통 곧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영혼의 상태를 고양시킨다고?

그런 것이다.

 

제 살을 터트리지 않고 제 몸을 늘이는 소나무가 어디있으며,

제 어린 날개의 털갈이를 하지 않고 어른이 되는 기러기가 어디있으며

작은 사과를 솎아내지 않고  잘 익은 사과를 수확하는 일이 어디있으며.

단단하게 굳은 땅에 김매기를 하지 않고 씨를 어디에 뿌릴 것이며.

 

정지가 아닌 모든 움직임은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파괴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파괴에 근거한 고통은 영혼을 실하게. 그리고 견고하게 만든다.

실하고 견고한 영혼은 어디에 가서도 깨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그의 말에 공감을 하며.. 조금만 더 내게 비극이 와라.

아직은 아픈 걸 보니,

실해질 공간이 남아있고, 견고해질 틈이 남아있나보다.

 

그가 말했다.

 

"비극만이 영혼의 상태를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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