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장난
-어느 암환자의 유서
함혜련
그가
-이 세상 어디엘 가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면
나는 행복해진다
이 세상에 돠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신에게
가장 감사한다
당신은 내가 꼭 살릴 것이다
라고 고백할 때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울었고
그는
그녀의 눈물을 혓바닥으로 먹었다
애초
남자 갈비뼈 하나로 빚었다던
그녀의 온 몸이 사랑에 녹은 용암처럼 되어
그의 가슴을 열고 깊이 스며들었다 뽑혀나갔던 갈비뼈의 자리로
되돌아가
감쪽같이 굳어버렸다
그 뒤
세상에는 온전한 남자 하나만 남았다
이제 더는 행복도 고마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 남자
사람은 없고
구름과 바람과 별만이 떠 있는 허공같은 그의 눈을 바라본 그
지지리도 머리가 나쁘고 잔인한 신은
세상이 너무 쓸쓸하고 외로워 살 재미가 없게 보인다면서
일방적으로 또
여자를 빚기 위해
그 온전한 남자의 가슴을 더 한 번 아프게 망가뜨려 놓을까
아니면
그럴만한 인정마저도 포기할지 몰라
나는 죽어 제발
신없는 세계에서 편안히 살고 싶다
96년도에 나온 함혜련이라는 분의 시집[물을 나르는 여인들]
우연히 굴러들어온 책에서 멈춰진 시이다.
더는 원하는 것이 없는데,
그저 가만히 두기만 하면 되는데,
태어난 것도 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 그것보다 더 바랄 것도 없겠지만
만약 신의 의지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아니 그럴리가 없다. 신의 의지로 내가 태어났을리가 없다.
그냥, 신은 장난을 친 것이고 즐겼을 따름일 것이다.
혼자 있는 아담에게 이브라는 여자를 옆에 두면 뭘하고 놀까 싶어서...
다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은 신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뚝 떼어내
주물럭 주물럭!
그렇게 재미있게 한 바탕 논 것에 대한 덤!
덤!
그냥 덤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신은 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지도 신경을 쓰지도 말고 그저 그냥 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던 것 처럼 그냥 던져두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자꾸 돌아다보는 신을 느낀다.
만들어놓고, 던져 놓고 보니, 뭔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나보다.
일만의 양심이 생기나보다.
이제 신이 인간을 닮아 내가 뭘하나 하고 자꾸 생각이 나나보다.
신이 내게 한 일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 던져주고 나에게 한 일이란?
덤으로 태어난 이브인 나이다.
누군가의 덤이 되기 위해 태어난 이브.
이브에게서 갈비뼈를 떼어내 또 다른 이브를 만들어 옆에 두고,
또 다른 이브를 만들어두고.
어느새 나 이브의 갈비뼈는 진화를 거듭하며,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르면 자를수록 자꾸 생겨나고
신은 그저 나의 갈비뼈를 떼어내 이브를 만드는 놀이에만 빠져있고.
그저 그냥 두면 되는데.
가만히 두면 갈비뼈는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고
내 옆에 갈등의 실체인 수많은 이브는 없을텐데
아담의 덤으로 태어난 이브는 이제 아담은 어디갔는지도 모르고
온통 나와 닮은 이브들의 세상에서 허덕인다.
신의 장난이라는 이 시를 읽고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시집에 있는 한 편의 시를 더 옮겨둔다.
물을 나르는 여인들
함혜련
아프리카 여인들이 물을 동이에 퍼담아 이고 걸어간다
인도에서도 예맨에서도
물이 쏟아질까봐 중심을 잡고 맨발로 흙길을 걸어
그래도 동이 밖으로 넘쳐 흐르는 물, 눈물
손으로 훔쳐가며
식구를 향해 가는
여인들처럼
지구는 가슴 속에 바다를 퍼담아 안고 간다
허공에 가슴의 물이 엎질러지지 않도록 궤도 위를 조심조심...
우리도 그랬는데
그래도 움직일 적마다 흔들거려
저 여인들의 얼굴과 가슴을 물방울이 적시듯
지구의 속가슴 가장자리로 넘쳐내린 눈물방울
나무들이 뿌리에 스몄다
줄기를 타고 땅위에 올라 가지끝으로 새 나온다
오늘같은 날에는 화사한 구름빛 물방울이 억만 개쯤
벚꽃되어 새나온다
눈물이 벚꽃이 되다니
꿀벌들도 모여 울만큼
부모와 자식 관계에 끌려
움직일 적마다 흔들거리는 물동이같은 내 눈
쏟아져 흐르는 눈물에 어려
꽃범벅이 된
지구도
물동이를 이고
식구들을 향해 가는 여인처럼 날아간다
아~ 물을 나르는 여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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