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박제천]판각사의 노래

by 발비(發飛) 2005. 9. 9.
LONG

판각사의 노래 그 여섯

 

아직도 남아있는 꽃 명 송이를 피울 힘이여

꽃 한 송이로 그대의 두려움이 허공에 떠 있고

거울마다 균열의 금이 그어진 그대의 얼굴이

꽃 한 송이로 숨죽여 엎드려 있고

그대의 뜰에 한여름의 햇볕을 붙잡아두는

꽃 한 송이의 힘이여

내게도 아직은 넉넉한 힘이여

 

 

판각사의 노래 그 일곱

 

내 열 손가락으로 그대의 하늘 열 개를 가리킨다

무색천

위의 더 많은 내 삶의 누에잠을 가려 보인다

무색천

아래의

더 많은 내 삶의 누에잠을 되풀이한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여덟

 

온몸에 햇빛이 들이찬다

가슴 깊이 햇빛이 비치면

그 곳

열 두 겹도 넘는 어둠도 또한 햇빛이다

햇빛을 따라가다 보면 햇빛 또한 어둠의

나라, 그 곳 열 두 겹도 넘는 햇빛 속의 어둠이 된다

 

판각사의 노래 그 아홉

 

낭떠러지 떨어진 달빛은 한 줄기 폭포로

허공에 선다

내 손을 떠난 글자 몇 개는

따로따로 한세상을 떠맡는다

달이 뜬 1천개의 강이 흘러간다

1천개의 달이 흘러간 자리에 다시 1천개의 달이 나타난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바닷물에 떠도는 원목더미에 햇볕이 내리 쬐인다

바닷물에 떠도는 원목더미에 바람이 마구 굴러간다

바닷물에 떠도는 원목더미에 별비치 내려 비친다

바닷물에 떠도는 원목더미에 소금물이 진하게 배인다

이제 바닷물에 떠도는 원목더미는

남해도를 잊고

거제도를 잊엇다

이승의 삶을 바친 공양이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하나

 

이 밤 유마힐이 손에 쥔 겨자씨 하나늬 무게

지붕 위에 얹어 둔 보름달 하나의 무게

묵화 속 대숲에 실리인 바람 하나의 무게

이제는 그림자뿐인 내 몸 하나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바다의 아득한 곳에서 전해오는 웃음소리여

 

판각사의 노래 그 열 둘

 

내 칼은 그대의 심장을 노린다

아니다 결코 그대의 심장이 아니다

 

내칼은 그대의 영혼을 노린다

아니다 켤코 그대의 영혼이 아니다

 

내 칼은 그대 마음속 부처를 노린다

아니다 결코 그대의 마음속 부처가 아니다

 

내 칼은 그대의 눈을 노린다

아니다 결코 눈이 아니다

 

내 칼은 그대의 눈길이 뻗어나간 만리를 노린다

아니다 결코 그대의 눈길이 뻗어나간 만리가 아니다

 

내 칼은 그대의 눈길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내 칼은 그대의 눈길이 가서 떠돌아 다니는 허공을 노린다

아니다 켤고 그대의 눈길이 가서 떠돌아 다니는 허공이 아니다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칼이 아니다

내 손의 칼은 그대의 심장이다

내 손의 칼은 그대의 영혼이다

내 손의 칼은 그대 마음 속 부처이다

내 손의 칼은 그대의 눈이다

내 손의 칼은 그대 눈길이 뻗어나간 만리다

내 손의 칼은 그대의 눈길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다

내 손의 칼은 그대의 눈길이 가서 떠돌아 다니는 허공이다

보라

라후라의 아비 그에게 다가가는

나의 칼은

 

판각사의 노래 그 열 셋

 

진주분사의 달빛이

가늘게 떨린다

진주분사의 하늘이 가늘게 떨린다

대반야의 사방 10리 이내에선

바람소리가 제 하늘로만 날아간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넷

 

서해를 떠돌다

섬이 된

기다림을 주겠다

바다가 피워올린

바다꽃 몇 송이를

주겠다

자도 이제는

잠이 아니라서

잠은

제 길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다섯

 

네 얽히고 설킨 삶의 덩굴을 풀어낸다

장미꽃이여, 세 번쯤 새 가지를 뻗고 세 번쯤 덩굴로

내 삶을 묶어놓은 장미꽃이여

빛깔과 향기를 모두 지워버리고

말라붙은 가시 몇 개로 나를 위협할 때까지

너와 나의 싸움은 하염없이 이어져야만 남는가

 

판각사의 노래 그 열 여섯

 

활활 타고 있는 불을 떠나보낸다

그 불곷에 피워보이는 내 삶의 장쾌함을 띄워보낸다

사랑하는 자여, 그대 서로 이어져 하나의 강을

만드는 불꽃을 모았는가

사랑하는 자여, 서로 이어져 하나의 강을

만드는 소리를 보았는가

마지막 울음소리를 떠나보내는 내 삶의 장쾌함을 보았는가

 

판각사의 노래 그 열 일곱

 

머리속으로 말발굽 달리는소리가 지나간다

불길이 지나가고 쓸러지는 그림자가 지나간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깊어진다

무디어진 칼날은 달빛을 받아 새로 날이 서고

식은 땀이 걷히면 다시 힘이 솟는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여덟

 

가도 가는 것이 아니며 와도 온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다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다 소리를 다섯 번만 되풀이하고

그렇다 소리를 다섯 번만 되풀이하고

먼 하늘 빈 구름에 利劍 하나를 띄운다

 

판각사의 노래 그 열 아홉

 

품자형으로 선 노송 세 그루 휘어지도록 달이 실린다

바람에 앉아 있는 품자형의 바위 세 개에 흐르는 물살이 비켜간다

금박의 유마경 석 자가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오고가는 물소리를 바라보고 있다

깊이 땅에 박아놓은 석장에 덩굴이 기어오른다

ARTICLE

판각사의 노래 그 하나

 

목어 한 마리 빈 하늘을 채운다

흘러가는 흰 망아지 한 마리 빈 삶을 채운다

이 땅의 소리란 소리는 죄다 빈 자리를 차지한다

탑 하나, 제 뒤의 산을 안으로 불러들이고

강물 하나, 제 앞의 빛을 속으로 불러모은다

이 적막한 그림 하나

산문에 걸어두고

뒷짐지고 서성이노니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판각사의 노래 그 둘

 

기다리는 자의 빛

기다리는 자의 어둠이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 속에

한 바다가

꾸며지고

기다림 속에

한 세계가 문을 연다

 

 

판각사의 노래 그 셋

 

한 마당의 끔이 펼쳐진 이 한 방울 물 속의

한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삶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이 눈을 가린 빛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야 할 모든 길을 버려야 한다

 

판각사의 노래 그 넷

 

허공에 얼어붙은 한류 한 줄기

벌거벗은 남화자의 전신

산수유꽃을 머리에 꽂은 흰 돌이마

가 보아라 만리 너머의 구름 그 너머

붕새 한 마리

그대에게 기별하노니

남화자도 이젠 한 꿈이어라

 

판각사의 노래 그 다섯

 

불이 꺼지자마자 잿속을 더듬었다

불타다 남은 골편

몇 개가 손에 쥐어진다

다비 뒤의 한 숨도 되돌이될수록

깊어진다

밤하늘에 빛나는

만월

그가 바로 내가 남길 한 알의 사리다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효근] 넥타이를 매면서  (0) 2005.09.12
[조양래] 꿈 외 1  (0) 2005.09.10
[복효근] 새벽  (0) 2005.09.08
[함혜련] 신의 장난외 1  (0) 2005.09.07
[한하운] 목숨  (0) 2005.09.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