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30.토
영화는 소설과도 시와도 미술과도 같은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보는 이로 부터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저급감동부터 고급감동까지...
찰라부터 긴 여운까지...
아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돈들인 영화였다.
다만, 억지로 끌어낸다. 친절하지 않은 영화였다.
2005.8.1.월
나로서는 이상했다.
어제 산행을 하면서도 생각했었다. 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일까?
지리산행준비때문에 맘을 다해서 영화를 보지 않은걸까?
나의 기억은 이영애의 얼굴과 최민식의 얼굴, 거기에 멈춰있다.
모두들 열광하는 박찬욱감독과 금자씨인데, 난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인지 내가 이상하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한다. 지리산에서도 생각하고 오늘 근무시간중에도 생각을 했다.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난 공통이고 싶은데...
퇴근길에 다시 한번 더 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연이은 생각은 웃기게도
'그 돈이라면, 차라리 덕수궁미술관을 한 번 더 갔다오겠다.'였다.
약이 좀 오른다.
내가 무엇을 보지 못한 것인지, 감독이 보여준 무엇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약이 오른다.
대충 그런 영화라면, 욕해주고 치우는데, 욕할 맘도 안 생기는 그저 아무런 느낌이 없다.
친절한 금자씨----제목 좋고,
이영애-----연기 좋고,
최민식-----역시 환상적이야
무대장치-----맘에 꼭 들었다.
컴퓨터 그래픽----- 맨 앞에 나오는 부분 정말 끝내주더라.
스토리라인-----소재가 아주 좋았다고 생각하지.
근데 뭐가 문제야? 모른다. 거기까지다. 난 전문인이 아니다. 포기한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건 영화를 보기 전 광고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인데,
이영애 무지 착한 여자가 복수를 한다는데, 그 복수가 복수의 완결편이랄만큼 처절하다는데,
-잠시 딴 소리-
난 그 복수가 13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처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이는 방법. 그 잔인함이 처절한 복수의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고통을 겪은 시간은 2.3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잔인한 지는 모르지만, 감옥에서 복수를 꿈꾸면 살았던 13년의 시간. 그녀의 내공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성급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딴 소리 끝-
아무튼 그녀가 꿈꾼 복수,
13년간 친절한 금자씨로 살면서 꿈꾸어 오던 금자씨
그녀는 진정 친절한 여자인가? 아니면 무서운 여자인가?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이 있다.
금자씨를 생각하면서 나를 생각한다.
난 친절하다.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친절함이나 아부가 골수에 베어있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학교때 별명이 '오리지날 아부'였겠는가?
모두를 좋아해서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다만 내 감정의 下限線일 뿐이다.
그건 왜 일까?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탓이다.
착한 것을 강요하는 사회탓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말씀하셨다. 웃어야 한다. 그리고 밝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웃어야 한다. 여자는 상냥해야 한다.
기분이 나쁘거나 울고 싶어도 아니 울면 화를 내면, 난 잘못을 한 것이다.
내가 화난 이유나 우는 이유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웃을 때 모든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누구도 '재는 왜 항상 웃는거야?' 하고 궁금한 사람은 없었다.
'너는 화 낼 일이 없니?' 하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순간 난 100가지도 더 말을 했을 것이다.
난 혼자 있을때만 정직했다.
친절한 나는 대인용이다.
혼자 있을때는 친절하기는 커녕 자신을 못 살게 구는 나쁜 아이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착하단다.
이제야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화가 날때는 화를 냈어야 하고, 울고 싶을 때는 울었어야 했다.
사춘기도 없었다고 안심했던 부모님,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부모님,
그건 너무나 큰 오해다.
-잠시 딴 소리-
우리 부모님의 교육방법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같다.
다른데 같은 것을 요구하고 같은데 다르게 행동하라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된 습관은 아직도 골수에 박혀있다.
-딴 소리 끝-
무서운 여자다.
이중성,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나도 그랬다.
지금 난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아무도 몰래 누구에겐가 복수를 꿈꿀런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 대상이 없다면, 자신에게라도..
사람이 가지는 미움이나 원망은 무슨 사건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같은 질량의 희노애락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세상은 공평하고 신도 공평하다고 생각하니깐 난 그정도의 믿음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재하고 있는 것들,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것들...
잘게 부숴가면서 세상에 내 놓아야 하는 것들이 있고,
서로가 녹아내리고 있는 희노애락을 감수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로의 모습으로 격려의 모습으로 같이 기뻐해주는 모습으로 같이 화내는 모습으로
그렇게 서로의 무게를 나눠가져야 한다.
나누지 못하는 사람, 안으로 숨기는 사람,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큰 덩어리로 폭발해버리는 사람...
친절한 금자씨...
친절한 흐음...
웃고 있는 내가, 친절한 내가, 불안하다.
누군가에게 이미 폭발했거나 폭발할 것이므로...
금자씨는 이제 계산이 끝났으려나.
질량만큼 친절했고, 질량만큼 복수했고, 그녀는 영화속에서 명을 다했다.
이것으로 금자씨는 나에게 할 것을 하고 간 셈이다.
난 그녀와 맺은 2시간여의 인연에 대한 충분한 성의를 보인 셈이다.
언제나 혼자서 이야기한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촛불을 끄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금자씨처럼...
2005.08.03
친절한 금자씨의 OST를 다운 받았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고 배우고 외웠다. 사실임을 느끼게 된다.
한 쪽 귀에다 꽂고 계속 들으며 일을 하고 있는데, 이건 독립된 스토리가 된다.
간간히 느껴지는 영화의 장면들과 그 눈빛들이
그리고 선율에 나의 상상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영화 음악이 좋다. 친절한 금자씨를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가 생기는 지금이다.
이 OST를 충분히 듣고, 몸에 잘 저며들만큼 듣고 나서 다시 영화를 보아야 겠다.
감독은 영화의 스토리나 음악을 별도로 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서로가 보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협조관계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충분한 시간동안 즐겨야 겠다. 그리고 극장을 다시 찾아야겠다.
머리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생각하면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며, 오직 감각만으로 보는 그런 영화감상이 되도록
오직 필만으로 보는 영화를 기대하며, .....
Vivaldi의
Cant 'Cessate, Omai Cessate' RV684:
Larghetto & Andante Molto:
Ah Ch' Infelice Sempre
비발디
칸타타 Omai Cessate(친절한 금자씨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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