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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순간파열

by 발비(發飛) 2005. 6. 22.

일은 모양과 때를 가리지 않고 온다.

오늘의 일은 박스포장을 하는 일이었다.

박스 1300개를 주문제작해서 책을 담아 넣은 채 배송하는 것이다.

박스를 일단은 테이프로 밑바닥을 붙이고, 책을 순서대로 담고, 다시 테이프를 붙이는

작업이다.

당연히 테이프 작업이 두번이나 있다.

처음에는 칼을 들고 테이프를 자르다가, 어느 순간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김에게 신경이 쓰였다.

자꾸 그를 긁을 것 같은 느낌때문에 손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가위, 가위를 들고 테이프를 자르는 것은 좋았는데,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속도가 느렸다. 당연히 김으로부터 구박을 받았다.

그 때 나타나신 분...

우리의 공장장님!

그 분의 시범이 이어졌다.

'자 봐라"

모나미 135볼펜을 들더니, 테이프를 박스에 붙이고나서,

번뜩 하더니 테이프가 잘라졌다.

손엔 볼펜밖에 들여있지 않았는데, 테이프가 짝뚝 잘려있었다.

그냥 한 손에 테이프 , 한 손엔 볼펜을 들고 작업시범을 보여주고 계셨다.

위험하지도 않고  날렵하기가 손이 안 보였다.

따라해봐야지!

나도 한 손에 볼펜을 들고 테이프에 갖다 대었으나, 테이프에 볼펜자국만 선명히 남을뿐...

좀 열받았다. 지진아같아서..

공장님의 슬로우비디오 시연이 이어진다.

"한 순간 날렵하게.. 알지?"

파박!!!!

뚝 잘라진다.

이제 나도 따라해본다.

처음에는 테이프의 방향이 대각선으로 잘리기도 하고 톱날처럼 잘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열심히 파박!!

완전 순간파열을 시켜야한다.

테이프의 분자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갈라놓아야 한다.

시간을 주면 그들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잡을 것이다.

난 최대한 멍청한 상태에 그들을 두었다가

왼손으로 테이프를 당김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볼펜끝을 날린다. 성공이다.

그렇게 성공하기 시작하자 박스에 테잎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고 있다.

더이상 옆의 김이 다칠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가위를 들었나 놓았다하는 수고도 하지 않아도 된다.

볼펜에 이런 가위나 칼의 기능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고?

나의 장난스런 박스테잎붙이기 연습이 계속되자. 박스의 모양이 그다지 가지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으며 깔깔거리며 테잎붙이기를 했다.

1300장의 박스를 붙이는 일이란 장난이 아닌데.

볼펜의 순간파열의 힘을 빌어 하는 박스붙이기는 노동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본다면 웃을 일이지만.

그걸 손으로 하고 있다고 비웃을 일이지만, 난 그래도 이런 날은 행복하다.

내가 볼펜의 쓰임을 달리 하고 또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나에게 새로운 재주가 하나 생긴날이다.

무엇에 사용할 재주는 아니지만, 난 그런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고 기뻐한다.

 

-순간파열-

 

순간파열을 생각한다.

나에게 누군가 떨어져야 할 일이 있다면, 아니 이별을 해야할 일이 있다면,

순간적인 힘으로 파열시켜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끊지 않아서 힘이 들었거나 감정의 끈이 오랜 것들.

그런 것들을 파열시켜야 한다. 난 이제 그렇게 하고 싶다.

아픔이나 이별의 시간을 길게 갖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박스테잎이 볼펜심의 가는구멍에 과감히 손을 놓아버리듯,

순식간에 자르는 힘은 그렇게 무의식중에 일어날 것이다.

아프지 않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꿈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일을 끝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별해야 할 대상과 나와의 끈을 순간파열을 시켜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이별할 때 혹은 어떤 대상과 멀어지려할 때

얼마나 긴 시간을 거기에 매달려 아파하고, 운명에 끌려다니는가?

 

혹 잔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살면서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이별하는 사람의 수가 배는 많은 것 같다.

죽음, 그 다음은 의견차이. 감정차이, 자존심...

이런 따위의 것들로 우리는 이별을 수없이 하게 된다.

살면서 살면서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이별하는 데 소모시키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별의 대상이 점점 적어져서 단 한 사람이 남고,

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것이겠지만.

그런 뻔한 수순에 너무나 많은 감정의 소모와 질척거림을 경험한다.

때로 10년 전의 이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때로는 20년 전의 추억과도 때로 이별하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며 아직도 이별을 하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이다.

 

순간파열...

어쩔 수 없는 운명. 아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순간파열이다.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 새로운 자리에 가서 턱하니 붙은 저 테잎들처럼

그리고 단지 평면이기만 한 박스를

공간이라는 그릇을 만들어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

순간파열당한 테잎처럼 그렇게 운명이라는 것은

또 다른 곳에서 턱하니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일거다.

 

순간파열하지 않고 질질 끌려다니는 이별은 결국은 어느 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서히 끊어진 테잎들이 서로에게 묻은 접착제때문에

엉켜붙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그냥 쓰레기통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삶에서의 이별들이 그런 것이다.

질질 끌어서 결국은 내발에 내가 엉키고 마는 그런 어리석은 이별을 한 것이다.

이별이 문제가 아니라 이별의 방법과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 난 테잎에서 배웠다.

 

순간파열을 경험했다

이별을 하지 않아야 겠지만, 만약 그럴수 밖에 없다면 난 순간파열을 생각할 것이다.

 

가장 이기적인 마음으로 순간파열을 선택할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렇게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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