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타고 나기에 절로 죽지 않고, 자신감은 타고나지 않기에 절로 솟지 않는다. 죽지 않는 것을 누르고, 솟지 않는 것을 파내는 노력, 그것이 단련이다. -홍정욱 [50] 중에서
아침 한 줄을 읽으면서 나는 홍정욱과 같은 생각을, 사색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절망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시이던, 소설이던 글쓰기 작업을 계속 했었다면 나는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지금보다는 나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출판사에서 콘텐츠사업쪽이 아닌 책을 기획하는 일을 계속해서 좋은 작가들을 만나는 일을 했다면 지금보다는 좀 나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타고난대로 두려움에 휩싸여있었고, 자신감과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홍정욱의 말처럼, 맞다.
두려움은 타고 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 3월인지 4월인지 일곱살에 입학을 한 학교를 떠나 전학을 갔다.
큰 운동장에 낯선 아이들 끝에 줄을 서 있었다.
빨간 깃발을 따라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앞에 아이가 자기 반이 아니라며 따라오지 말라고 위협을 했다.
나는 그 깃발을 따라가기를 멈추었고, 모든 아이들이 깃발을 따라 교실로 들어간 뒤, 큰 운동장 한 켠에 앉아있었다.
운동장은 그 끝이 안 보일정도로 컸고, 몇 층짜리 학교 건물에서는 아이들의 소리로 윙윙거렸다.
일곱살에 나는 엄마도 찾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고,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끝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내 가슴이 쿵닥거렸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이 난다.
나는 그 때 그 학교, 그 학교를 다니는 내내 쫄았고, 무서웠다.
2학년 2학기에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학교 친구도, 선생님도, 뭣도. 이상하리만큼 나는 아무 것도 없다.
6학년때 몇몇 기억을 제외하고는.
두려움이다.
친구들은 그런 내 기억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두려움은 타고 나기에 절로 죽지 않고, 자신감은 타고나지 않기에 절로 솟지 않는다. 죽지 않는 것을 누르고, 솟지 않는 것을 파내는 노력, 그것이 단련이다.
오늘 아침 나는 이 말을 다시 읽으며 내게 단련의 시간이 없었구나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학교라는 곳, 가정이라는 곳에서 단련되지 못하게, 흔히 말해 여물지 못한 채 살았던 거구나. 생각한다.
직장을 다니고, 그곳에서 단련되고, 단련된 것들이 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느낌일까, 그에 대한 답이다.
끊임없이 단련되었어야 했다.
두려움은 누르는 일을 잠시만 쉬면 솟아오르는 너구리와 같은 것이었다.
두려움과 자신감은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아쿠아로빅을 처음 갔을 때, 풍경은 놀라웠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할머니들이 물 속에서 운동을 하는 사이에 끼어 나도 운동을 했다. 물 속에서 균형을 잡아 서지 못하였지만 할머니들 사이에서 나는 균형을 잘 잡는 축이었다. 나는 약하고 여린 존재들 사이에서 여지를 느꼈다. 천천히 몸이 물에 익숙해지니, 그 어려웠던 수영도 점점 나아졌다. 물을 즐길만 해졌다. 그렇게 단련하는 것이었다. 몸이 그렇듯 마음도 그렇게 단련해 가면 될 거다.
그때도 지금도, 낯선 곳에 놓여있기는 마찬가지다.
직장이라는 공간에서의 안전함이 아닌,
저 끝은 늙음과 죽음이 있을거라는 막연함.
일곱살때 보았던 끝이 보이지 않던 큰 운동장,
웅웅거리며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 지금 나는 그때 그곳에 다시 서 있는지도. 꼼짝않고 서 있었던 일곱살 아이처럼 지금도 서 있다.
더는 열정에 가득차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를 일이 없을 것이며,
더는 비오는 안나푸로나를 오를 일도 없을 것이며,
더는 뜨거운 태양 아래 산티아고길을 걷지도 못할 것이며,
그런 것에 기대 나를 단련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울 동안거에 들어가는 스님처럼 이 자리에서,
홀로, 스스로 단단해지고 단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낯선 일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러고 싶다.
오늘 아침 열어본 책장에서 결연해졌다.
그리고, 한 줄 더 읽는다.
"매사에 여분을 지니라. 그래야 그대의 탁월함을 지킬 수 있다. "
그래, 그러자.
한번 가보자.
아쿠아로빅 할머니들은 샤워장에서 내게 늘 말씀하신다.
"젊어서 좋겠다."
"젊은데 뭐"
누르고 파내어 보는 거지 뭐. 그리고 거기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 여분을 두자.
매사에 여분을 지니라. 그래야 그대의 탁월함을 지킬 수 있다. 모든 능력과 힘을 한꺼번에 모든 일에 소모하지 말라, 나쁜 결과에 이를 위험에 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여분을 남겨두라. 구원병은 공격병보다 더 큰 도움이 되며 그대의 가치와 명망을 돋보이게 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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