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토요일 아침
김수영 시인은 [적2]라는 시에서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의 아량이다'
라고 했다.
오늘도 날이 흐려 정신인지 마음인지가 분주하다. 집중이 생기기 이전 단계인 듯 하다.
좀 기다리자 싶어,
어젯밤 한강을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 작은 소국 화분 두 개를 화분에 옮겨심었다.
올해는 이만이라고 온 몸으로 말했던 루꼴라를 거두고 난 빈 화분에 노란 국화를 심은거다.
그 흙 그대로를 쓰는 것이 맞나 싶었지만,
흙을 북돋우고, 액체비료를 좀 뿌린 뒤 심어주었다.
이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정신인지, 마음인지가 좀 다듬어지는 듯 하다.
이 일을 할 때는 최백호의 '바다 끝에서'라는 노래를 무한 재생 시켰다.
이 일을 끝나고, 어제 어질러 놓은 것, 그러니까 벗어던진 옷들, 먹은 그릇들, 책상 위 책들을 정리할 때는 요요마의 첼로곡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현관문을 닫고, 사방에 열어두었던 창문도 닫고, 열어있던 방문도 닫고, 닫을 수 있는 것들을 닫고,
여름에도 그리 틀지 않았던 에어컨을 틀었다.
바깥 세상이라고는 없는 듯 적막이다.
-잠시 딴 소리-
'적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네이버사전을 찾아보았다.
적막 (寂寞)
1. 고요하고 쓸쓸함.
2. 의지할 데 없이 외로움.
이거 아니다. 'It's very quiet.'다
그냥 조용하다고 했어야 하나.
다시, 바깥 세상이라도 없는 듯 매우(엄청, 완전..) 조용하다. 아니다.
-잠시 딴 소리 끝-
바깥 세상은 없는 듯, 세상에는 오직 내가 있는 이 공간만 있는 듯 하다.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처럼.
석양을 원하는 대로 볼 수 있고, 뜨는 해를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행성.
나도 원하는 음악을 내 맘대로 들을 수 있고, 문을 닫을 수 있고, 열 수 있고, 계절을 바꾼다.
소행성의 어린 왕자처럼.
'사람 따라 별들은 다 다르지.
여행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별은 안내인이지.
어떤 사람들에겐 별이 조금만 빛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학자인 어떤 사람들에겐 별들이 문제이지.
그 상인에게는 금이고,
하지만 별들은 말이 없어.
아저씬 다른 사람들을 갖고 있지 않은, 별들을 갖게 될거야.'
조용한 것이 아니라 적막한 것이다.
흐린 날 신의 아량으로 얻은 정신 집중으로,
어제 한강에서 내게 온 단어인 '선배'를 다시 떠올린다.
선배인 어린 왕자의 말대로,
나도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거다.
지금도 너무 어려서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사랑을 발라버렸다.
선배인 어린 왕자의 '사랑', 그 결말이 뭐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도 너무 어려 그걸 몰랐던 거다.
[어린 왕자]를 다시 읽기로 한다.
어제의 '선배'와 오늘의 '적막'
나의 소행성에서 의자를 옮겨앉으며 원하는 바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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