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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집사 식물집사

(대)파가 꽃을 맺었다

by 발비(發飛) 2022. 3. 23.

파에 꽃봉오리가 맺었다.

꽃봉오리가 맺자 파가 힘을 잃기 시작했고, 색도 좀 바랬다. 

꽃이 핀다는 기대가 되기보다 힘을 잃어가는 파를 보면서

넷플릭스의 [친애하는 나의 문어선생님]의 마지막이 생각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동안 밥을 잘 안 해 먹었기 때문에 파도 잘 사지 않았더랬다. 파를 넣는 것을 생략하기도 했다. 

혹 꼭 필요해서 사게 되더라도 같은 이유로 대부분 냉동실에 넣어 보관했다. 

파는 늘 얼어있는 상태로 먹었다. 

언 파는 좀 질겼다.

 

올 겨울내 대파를 사서 화분에 심어놓고, 

밥을 해 먹을 때마다 파는 그때 그때 잘라 먹었다. 

이번 겨울은 내내 집에 있으니, 방법을 달리해보고 싶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반찬을 먹을 때마다 부드러운 파를 먹고 싶었다.  

밥을 열심히 해 먹어서인지, 어느새 파는 하얀 밑둥만 남았다. 

 

먹을 것이 없어 보이는 하얀 밑둥만 남은 파 화분을 양지 바른 베란다 앞에 두고 정성스레 물을 주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꼼짝 않던 파에서 파란 움이 트기 시작하고, 

여리고 파란 잎을 힘차게 내밀어 참 이쁘다, 파가 이리 이뻐도 된다고, 하면서 여기 저기 말해주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존재를 알리는 마음으로

힘을 내는 모든 존재들을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마음으로

난 여리고 파란 잎을 내민 파 화분을 가장 좋은 자리에 두고 매일 쳐다보며 사랑을 주었다. 

 

지난 주에 여리고 파란 잎은 꽃봉오리를 잉태했다. 

하트 모양의 작은 꽃봉오리가 하나, 둘, 셋, 이틀의 간격을 두고 여리고 파란 잎 곁에 올라오고 있었다. 

아, 꽃을 피우나. 보다.  처음이었다. 

(난 화분이 꽤 있지만 꽃을 피우는 화분은 없다)

 

그런데 말이지. 

꽃이 조금씩 부피를 키우자, 아직 여리고 아직 덜 파란 잎이 힘을 잃어간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파잎은 맥없이 꺾이기도 했다.

물을 아주 조금씩 더 줬다. 

임신한 여자가 식욕이 왕성해지듯 파도 ......., 

 

다시, [친애하는 나의 문어선생님]에서 상어의 공격에 문어 다리를 잃고도 생명을 지켰던 문어가 

새끼를 배고 낳고, 하면서 하얗게 빛깔을 잃어가고, 끝내 죽게 된 문어의 마지막에 함께 울었었는데, 

겨울을 함께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지금,

나는 응원을 할 수가 없다. 

꽃에게 박수를 보낼 수가 없다. 

여리고 파란 잎이 나올 때의 응원은 할 수 없다. 

아파서,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물을 주고, 쳐다보고, 너무 빨리 왕성하게 꽃이 피지 않기를 바라면서.

현재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밑둥이 하얗던, 갓 여리고 파란 잎을 내었던 그 파를 위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작은 충격도  주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물을 주며, 

생각한다.

 

나는 어디인가? 

 

꽃을 품어버린 파의 지금인가?

아닌 다시 살아나 여리고 파란 잎을 내던 그 때인가?

아님 내게 오지 않았던 너른 어느 들판에 있던 그 때인가?

 

오래보자, 

그 모습이 무엇이던 말이지. 

 

생명生命, 

1.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
2. 여자의 자궁 속에 자리 잡아 앞으로 사람으로 태어날 존재.
3. 동물과 식물의, 생물로서 살아 있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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