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마음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일체유심. 실제 마음일까?
“인간을 알기 위한 유일한 기초는 경험과 관찰이어야 한다” -데이비드 흄
혹시 노루벌을 들어봤는지.
노루벌: (동물) 애벌레가 살아있는 노루의 가죽 속에서 자란 후 성충이 되어 가죽을 뚫고 나오는 기생벌.
고등학교 때인가, 대학교 때인가 노루벌이야기를 들었다.
노루벌은 노루의 가죽 속에 알을 낳고, 그 속에서 애벌레로 자라고, 성충이 되면 일제히 노루의 가죽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곤충들은 알을 낳으면 하나만 낳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개를 낳으니 수십 마리의 성충이 된 벌이 노루의 살가죽을 뚫고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개미라도 나비라도 아플 건데, 뾰족한 침을 가지고 있는 벌이 일제히 노루의 살가죽을 뚫고 나온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노루도 있다고 했다.
노루벌의 지독함과 노루의 고통이 내게 완벽히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노루를 한라산 중턱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산을 오르다 지쳐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고, 노루는 그런 나를 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루는 돌아섰다. 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저 모든 평화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노루벌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나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노루벌을 생각한다.
노루만큼 고통스러운가, 노루처럼 안 아픈 척하는건가, 노루처럼 살아야하는건가. 그리고 노루벌은 영원이 노루와 함께 하는 건가. 그렇다면....
벌써 5년전이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스페인을 여행할 때 알베르게 혹은 호스텔의 도미토리에서 묵으며 세 달 넘게 지냈다. 알베르게건 호스텔이건 많은 사람들이 한 방에서 잠을 자는데, 정말 희한하게 나는 계속 벌레에게 물렸다. 빈대이기도 하고, 이름 모를 벌레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꼭 나만 모기에 물리니까 내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여름밤이면 내 옆에 사람들이 몰리곤 했다.
벌레 중에 빈대는 정말 최고인데, 빈대는 옷 속이나 짐 속에는 숨어있다가 틈만 나면 자리를 옮긴다. 옮기는 발자국은 몸에 지도처럼 빨간 반점이 찍혔다. 점선. 얼마나 지독한지, 아니면 한국에서는 멸종되어서 더 민감한 건지. 혹시 순례길에 빈대를 묻혀올까봐 산티아고 순례자를 받지 않는 한인숙소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산티아고의 프랑스 루트를 벗어나 북쪽 루트의 중간지점인 야네스 알베르게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세탁기를 보자마자 옷이며 신발이며,배낭이며 가진 모든 것들을 세 번, 네 번 돌리고, 고열의 건조기에 거의 삼십분을 돌리고도 모자라 마트에서 지퍼팩에 사서 옷이며, 양말이며 모두 따로따로 밀봉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낯선 곳을 갈 때마다 몸이 스멀거리고 가려웠다.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하려다가도 올록볼록 빨갛게 올라오는 것을 보면 대체 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때 내 몸에 빈대나 벌레가 아니라 내가 내 몸 속에 노루벌의 애벌레가 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제는 개그맨인 박지선이 하늘나라로 갔다. 극심한 피부알레르기때문에 늘 고통스러워했다고 했다. 피부의 고통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노루도 알겠네. 노루벌이 평생 함께 해야한다면, 늘 자신의 가죽 속에 알을 낳는 노루벌이 곁에 있다면, 박지선의 몸에는 노루벌이 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고통스러웠다. 집에 가서 돌이켜보니, 기억이 없을정도로 멍했다.
아침이 되니 몸이 고통스럽기 시작하자, 노루벌을 생각했다.
나는 노루가 아니므로, 노루벌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그 때의 고통도 노루벌때문이 아니고,
스페인 숙소에서도 노루벌을 만난 것이 아니라 빈대를 만난 것이고, 빈대는 위생관리가 되지 않았던 숙소의 벌레였다.
내 탓으로 돌릴 때가 많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 내 마음을 다스리자고 했다.
누군가는 청소와 소독을 깨끗이 해야하는 자기 본연의 일을 하지 않았고,
나는 나 자신을 감안하여, 내가 건강히 지낼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잘 알아보고, 내 몸을 뉘여야 했다.
견딜 자신이 없다면 말이다.
애초에 노루벌의 존재를 묵살하고 아는 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내 몸에 스멀거리는 느낌을 견디지 못할거라면,
노루벌은 노루에게만 기생한다는 그 사실도 정확히 인지해야 했다.
냉철해져야 마음이 그리고 몸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을 다스리고 삭히기 보다 냉철해지는 것이 맞다.
마치 사람이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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