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겨듣는 曰(왈)

[옷 만드는 편집자] 지문

by 발비(發飛) 2020. 9. 22.

이 말을 하면 안 믿을 수도 있다.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나도 놀랬으니까...., 나도 설마 했으니까. 

 

퇴근을 하고, 밥을 먹고, 침대에서 잠시 쉬다가. 

주문받은 원피스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섯벌의 원피스, 허리 감아 박기와 밑단을 박으면 끝이 난다. 

주말에 결국 다 하지 못한거다. 

 

티비를 틀어놓고 일을 한 건데. 

어느 예능프로에서 지문 모양에 따른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 지문은 어떤가 본거다. 

근데...., 지문이 없어졌다. 

정말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엄지, 검지, 중지까지 지문이 없이 맨질맨질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산 노트20에 지문등록을 했는데, 늘 인식이 잘 안되어 결국 패턴으로 잠금화면을 열었었다. 

대체 왜 인식을 못하는거지 하면서 속으로 툴툴거렸었다. 

 

지문이 없다. 

재단을 하건, 주름을 잡건, 박음질을 하건, 

옷 만드는 모든 작업에 손가락 끝은 유용하다.

손가락 끝을 두드려 위에 있는 원단과 아래에 있는 원단을 가지런히 하고,

손가락 끝으로 놀러 단을 접고, 주름을 접고, 바이어스를 박고, 

박음질을 할 때도 너무 누르지 않고 손끝을 얹어두는 정도로 천을 밀고, 

지문이 닳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거다. 

그래도 너무 하긴 하다. 

손이 무슨 고무지우개도 아니고, 이렇게 무른 것이었다니. 

생각하다가, 

 

내 노동이 이토록 고되었던가. 

스스로에게 찡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은 일인 듯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노동으로 지문이 닳아본다는 것.

삶의 고단함을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다는 것.

고독이나 갈등. 사랑이나 미움, 원망이나 탄식 등이 아닌(이 아니라 보다)

몸이 닳아지는 것으로 삶을 느낀다는 것. 

 

닳아서 얇아진 뒤, 견디지 못해..., 생길 굳은 살

그리고 

굳은 삶을 기대한다. 

 

노동자의 굳은살 박힌 손은 자존심과 용감이란 여린 세포조직에 통하고 있다. 그들 조직은 나태의 활기 잃은 손길보다 우리의 가슴을 자극시킨다.  -<H.D 소로/ 걸어가는 길>

 

 

 

 

 

 

'새겨듣는 曰(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산화  (0) 2020.10.13
가을에 핀 봄꽃  (0) 2020.10.06
[일상] 해를 등진다는 것  (0) 2020.08.26
[파커 J. 파머] 삶이 말을 걸어올 때  (0) 2018.08.30
호모 사피엔스의 '...'   (0) 2018.04.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