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란 내 온전함을 지킬 수 있는 한계라고 했다.
흔히 선이라고도 하지.
만남의 경계, 만남의 선
"영화 보실래요?" 라는 문자를 보내고, 기다린다.
나는 이렇게 기다린다.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우리는 무슨 말이던 해 놓고 기다린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저장된 사람,
겹겹이 쟁여져 있는 저장된 사람들을 하나씩 들추어낸다.
레이어와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려놓은 레이어.
이전 사람들은 차례로 뒤로 밀려 숨은 레이어가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한 번 두 번 만날 때마다 그와 나의 색이 입혀지고,
(이건 새로운 사람과는 상관없이 내 안의 세계에 그려 놓은 그일 뿐이다)
어느 정도 우리라고 할 수 있는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하면 나는 늘 전과는 다른 그림이, 다른 결말이 나기를 기대한다.
이 때다.
신기하게도 이때 지난 시간 우리였던 만남을 소환하고 만다.
그때와는 다른 결말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은 레이어들은 일제히 소환되어 새로운 우리를 그려 놓은 새 레이어와 비교하고 만다.
치명적이 된다.
차연은 N을 만난다.
N은 차연에겐 완전한 여자다.
N을 보면,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6명인지, 7명인지, 8명인지)이 모두 떠오른다.
N을 만나면서 헤어진 여자들은 모두 소환된다.
어쩌면 나는, 빌어먹을, 주영을 사귀면서 선희 같은 여자를 꿈꾸었던 것일까. 지민을 사랑하며 제니 같은 여자를 꿈꾸었던 것일까. 민조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며 채환 같은 여자를 꿈꾸었던 것일까. 선희를, 지민을, 주영을, 제니를, 채환을, 민조를, 이연을 그토록 열심히 사랑했지만 결국 남남이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한때는 진심으로 진심이었건만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 모두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N은 사라진다.
차연은 한없이 N을 그리워한다.
N은 미래에서 보낸 ai, 차연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차연에게 딱 맞는 여자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N의 수명은 몇 개월 정도라 그 수명이 다할 때마다 여자는 완전히 새롭게 포맷된다.
결국은 차연에게 완전한 여자로.
세상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했던 대상이 세상 무엇보다 처절한 상실의 고통으로 변해가는 일련의 과정. 나 아닌 누군가에게 얼마나 미치도록 미쳤었는지를 가장 어이없는 방식으로 입증하는 관계 변화. 집착이 클수록 뒤에 가 망각 또한 깊어짐을 알지 못하는 한 시절. 이별
차연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차연은 매번 포맷되는 자신에게 완전한 여자와의 만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살 것인지,
차연은 무한반복될 완전한 여자와의 삶을 선택한다.
30대의 자신과 40대, 50대 계속 이어질 자신의 삶을 완전한 여자와 함께 하기로 한다.
언젠가 내가 약해지고 느려지고 블편해지고 사라진 이후에도 내게 더없이 완벽한 그녀는 끝내 세상에 남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겠지. 언젠가 늙고 약해지고 느려지고 사라질 걱정 없이 부조리한 생을 부조리하게 비웃으며 이겨내겠지. 그렇겠지, 그녀라면.
뭐 그런 이야기이다.
레이어,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켜켜이 우리의 기억 속에 쟁여있다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접점이 있는 레이어가 등장한다.
호감을 가진다.
레이어 중 사용되지 않는 부분이 영원히 그곳에 숨어있으면 좋으련만 늘 등장해 너는 왜?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만남,
그가 나를 만나면, 그의 눈 속에서 타인이 보인다.
아마 그도 내 눈 속에 타인을 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도 각자 눈 속의 그들을 그리워한다.
우리에게 그들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숨은 레이어로 겹쳐져 있어 드러나지 않을 뿐,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N은 다르다.
일정기간 수명을 다하면 완전히 새롭게 포맷되어, 모든 기억의 레이어는 삭제된다.
각 레이어들의 병합을 통해 누군가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겠지.
N을 포함한 미래에서 온 사람은 사랑에 지난 기억(레이어)이 다가올 사랑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각자의 원형이 아니었을 단 하나만, 오직 단초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를 포함한 여러가지인데 말이다.
차연의 선택, 본인의 레이어를 포기한다.
N이 사라질 때마다 약을 먹을 것이고, 약을 먹을 때마다 기억은 사라질 것이다.
차연은 레이어를 포기하고, 현재의 완전한 사랑을 선택한다.
무한반복하는 사랑.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완전한 사랑은 벌인가? 상인가?
그래서...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 챕터가 소제목만 다를 뿐 똑같다.
로망스시리즈 소설인데, 윤회 혹은 평행이론 등 비평가가 설을 풀자면 엄청 풀어질 소설로 읽혔다.
-소설의 시작-
<오직 하나뿐인 그대>
드디어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급기야 이처럼 선언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방금 내가 뭐라고 했죠?
사랑.
사랑.
오마이갓 이게 얼마만인가!
11시 52분.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취했으며
밤공기가 적당히 달콤한 데다
막차가 아직 끊이지 않은 시간이네요.
열차를 타고 시 경계선을 넘어 마을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집 동네에 다다르면 새벽 한시가 조금 넘겠지요.
오늘 같은 밤이라면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로 간단한 술상을 봐서 소주 서너 잔에 새로운 사랑을 자축해도 좋겠군요.
고요한 밤 흐뭇한 밤.
방금 전 헤어진 그녀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 다정한 목소리를.
그 상냥한 미소를.
발끝이 두둥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발길을 돌리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같지 않은 날.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는 알 수 없어도, 당장은 이런저런 사연들을 더 만들고 싶지 않을 만큼 각별한 날이니까.
끝도 없이 그윽한 이 마음을,
지금 그녀도 알고 있을까요?
-소설의 끝-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드디어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급기야 이처럼 선언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방금 내가 뭐라고 했죠?
사랑.
사랑.
오마이갓 이게 얼마만인가!
11시 52분.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취했으며
밤공기가 적당히 달콤한 데다
막차가 아직 끊이지 않은 시간이네요.
열차를 타고 시 경계선을 넘어 마을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집 동네에 다다르면 새벽 한시가 조금 넘겠지요.
오늘 같은 밤이라면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로 간단한 술상을 봐서 소주 서너 잔에 새로운 사랑을 자축해도 좋겠군요.
고요한 밤 흐뭇한 밤.
방금 전 헤어진 그녀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 다정한 목소리를.
그 상냥한 미소를.
발끝이 두둥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발길을 돌리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같지 않은 날.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는 알 수 없어도, 당장은 이런저런 사연들을 더 만들고 싶지 않을 만큼 각별한 날이니까.
끝도 없이 그윽한 이 마음을,
지금 그녀도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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