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 이 시는 매력적인 시가로 읽히기 보다 마치 jtbc의 손석희 앵커가 '앵커브리핑'에서 하는 말인 듯이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는 살아있다면 백살도 더 된, 생의 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 터키의 저항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쓴 시이다.
오십년인지, 육십년인지도 전에 터키의 혁명을 위해 싸우다 반평생을 감옥에서 지낸 이국의 한 시인은
오직 북창만 보이는 감옥에서 아직 오지 않은 최고의 미래가 꼭 오기를, 그 곳에 갈 수 있기를, 꼭 이루어지길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처한 어둠이 너무 짙어 촛불 한 두개로 밝힐 수 있는, 간단한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이 밝힐 수 있는 것은 겨우 점 하나 촛불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제 방을 밝히기 위한 촛불이 아니라 함께 켜는 촛불을 말한다.
감옥 안에 있는 내가 촛불을 밝혀야 하고,
저기 어느 곳에 있는 당신도 촛불을 밝혀야 하고,
우리 모두가 작은 촛불을 밝혀야만 짙고 거대한 어두움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나짐 히크메트, 그는 하늘나라에서 광화문의 촛불을 보았을까?
그가 보았으면 한다.
그의 나라가 아니라 아쉬워하겠지만, 그가 그린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에게 나와 너와 우리가 다함께 촛불을 켜 짙고 거대한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은
어쩌면 이루지 못할 꿈이었을텐데, 우리는 그의 꿈을 서울에서 이룬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내가, 너가, 우리가 촛불은 켰다.
하늘나라에서 그가 우리의 광화문을 보았다면, 내가 평생 꿈꾸던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낯선 이방의 오래 전 시인의 시를 읽으며 기분이 묘하다. 세상은 이렇게 이어져있다.
...그런데
그는 다음이, 그것이 끝이 아님을, 어둠은 그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길고 깊다는 것을 알았을까?
분명 어둠은 빛보다 그 뿌리가 깊다.
뉴스에는 태극기를 흔드는 무리가 나오고, 그들의 말대로 '묻어버린' 살인사건이 나오고, 주인도 몰라본 '편지'가 나오고,
끝이 없다.
나는 앞으로 태극기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 수 있을까?
주말에 독감으로 끙끙 앓으며, 티비를 보다가 든 생각이다.
태극기가 낯설다.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텐데, 우리는 모두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대표가 올림픽에 가서 가슴에 손을 얹고 봐야 할 태극기일텐데,
태권도장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가슴마다 붙여져있을 태극기일텐데,
그때마다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이 이상했듯 그 사이 태극기가 이상하다.
마치 <완장>이라는 윤흥길작가의 오래된 소설에 나왔던 그 '완장'처럼, 태극기가 그렇다.
왜 저걸 들었을까?
이 일이 어떻게 끝이 나던 우리는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파놓은 늪은 대체.... 너무 넓고 깊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의 한 구절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이것 또한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의 한 구절이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절망 속에 빠지는 내가 오늘 믿고 따라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살아있다면 백살도 훨씬 더 된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북창만 겨우 뚫린 감옥에 갇혀서도 잃지 않았던,
그의 마음, 빛나는 문장이다.
진정한 여행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히크메트[ Nazim Hikmet ]1902.1.20 ~ 1963.6.3
그리스의 살로니카 출생. 터키의 고급관리 아들로, 1916년 이스탄불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8년 해병들의 혁명운동에 가담한 죄로 군적에서 제적되었다. 1921년에 모스크바의 쿠토베에 유학, V.V.마야콥스키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고 1924년 터키로 돌아와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7년에 체포되어 감옥 안에서 시(詩)와 희곡을 썼으며, 1950년에 석방되어 이듬해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일본의 히로시마[廣島]를 읊은 《죽은 계집아이》 《일본의 어부》 등의 시가 있고, 그 밖에 희곡 《다모클레스의 칼》, 소설 《로만치카》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잠시 딴 소리
우연히 본 나짐 히크메트의 촛불시를 보고 누군가의 꿈은 어디 멀리서 그가 알지 못하게 이루어지는구나
뭐 이런 묘한 생각으로 긁적였는데, 그러다가 거리의 태극기도 생각나서 또 긁적였는데,
저녁 jtbc 뉴스 시간에 좌우와 선악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촛불과 태극기에 대한 앵커브리핑을 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는 것일텐데, 그들은 절대 악이 되어 가고 있구나.
대통령은 무치했고, 그의 측근들은 잔인하고도 비열하다.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 정도라 2부는 없다고 말한 영화 [내부자들]의 감독 말처럼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겪지 못한 세상인 박정희의 유신독재나 전두환의 유신독재가 이러했을수도 있다.
그때 우리 선배가 든 것은 태극기였는데,
촛불과 태극기가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손석희 앵커의 말을 듣다보니
태극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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