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그는 안전하다. 나는 그의 곁에 깃들어 자유로웠다.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대답해 주었다. 가르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가 설명하는 말은 대부분 이해가 쉬웠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은 것을 언제 공부했을까, 어떻게 모두 기억할까, 하고 샘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가끔 그의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몇 개의 단어를 바꾸어 다시 질문을 했다. 그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쓰는 단어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간혹 제법 긴 생각 끝에 답을 할 때도 있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자살'을 입에 올린 사람의 눈을 보며,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인내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내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가끔 질문이 궁하면 지금도 자살을 생각해요? 하고 아무렇지 않게 묻기도 했다. 그럼 그도 아무렇지도 않게 네,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또 안심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자살은 그가 내게 안전하다는 신호 같은 것이다.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를 떠올린다. 마치 시인은 그와 나, 우리의 인연, 그리고 세상 모든 인연들에 대해 비극적 결말을 예언했다. 수없이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이미 세상에 없는 시인을 원망한다.
처음부터 그의 옆은 안전했다. 그의 앞에서 내 말이 자유로웠고, 처음 부르는 노래가 자유로웠고, 마음 또한 자유로웠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오기도 했다. 졸다가 눈을 떴을 때, 그와 나란히 앉아 노래를 부르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이제 안전해? 불쑥 던진 내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고, 처음으로 그와 내가 손을 잡았을 때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빠졌다.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함께 위험해졌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며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이미 너무 많은 위험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나는,
너무나 익숙한 위험 속에서 있었던 나는,
더 이상 절대절망에 빠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우리가 함께 위험해진 것을 감지했다.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던 그를 위해 수 천가지로 뻗은 길 속에서 어떤 길로 가야 그가, 그의 곁에 있는 내가 다시 안전해질 수 있을까. 손을 잡았는데, 왜 위험해진건가요? 그의 혹은 그가 아닌 누군가의 대답이 듣고 싶다. 두려움없이 마주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 침묵에 파묻혀 오랫동안 서로 옆구리를 스치며 길을 간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뜻도 없는 말들을 교환한다. 그러나 위험한 시간을 당해 보라. 그러면 그들은 서로서로 돕는다. 그들은 같은 동체 속에 속하여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양심들을 발견함으로써 마음이 넓어진다. 사람들은 함박 웃으며 자기를 돌아본다. 바다가 한없이 넓은 것을 놀란 눈으로 보는 그 석방된 죄수 같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대지> 중에서, A.생떽쥐베리
생떼쥐베리는 말했다. "위험한 시간을 당해 보라. 그러면 그들은 서로서로 돕는다."
우리가 만나기 전, 나만 위험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위험했던 것이다.
위험했던 나와 위험했던 그, 우리는 서로를 도우며 어떤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나의 마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했던 각자의 마음에
각자의 마음 하나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 비좁았던 마음에
때로는 그의 마음에,
때로는 나의 마음에,
우리는 함께 서로의 마음에 드나들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사는 한 사람의 마음,
한 마음보다 두 마음이 드나들었던 만큼 넓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가끔 그가 슬쩍 빠져나간 뒤 홀로 남겨져 헐렁해진 마음조차,
그가 나의 마음 속으로 얼른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빛나게 하고 싶다.
그러므로 멈출 수 없다.
다시 까마득한 어둠속에서 위험한 내가, 위험한 그를 만나, 그가 긴 시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야 말 것이다.
어려워?
북극성도 뜨지 않은 까마득한 어둠과 만나게 될 지라도,
한없이 넓은 바다를 건너 아프락사스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기 위해,
깍지 낀 두 손을 들어 한없이 넓은 생떽쥐베리의 바다가 저 어디에 있다고,
저 바다 건너 아프락사스가 있다고 말하며, 그를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의 옆은 안전하다. "지금도 자살을 생각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손을 끌어 가슴에 얹는다. "지금, 죽음보다는 밝겠지."
.
.
시와 소설, 그 속에 있는 몇 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공자의 생활난(生活難)-1945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출처] 일요일(공연과 모임) 후 떠오른 시 - 공자의 생활난 (세상과 연애하기) |작성자 아재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촛불 그리고 태극기 (0) | 2016.12.19 |
---|---|
[문정희] 비망록 (0) | 2016.12.15 |
[김형수]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0) | 2016.11.02 |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 (0) | 2016.10.12 |
[허연] 그날의 삽화 (0) | 2016.10.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