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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이진우] 니체의 인생

by 발비(發飛) 2015. 8. 26.

'당신이 서 있는 장소를 깊이 파고들어라. 
샘은 당신의 발 아래에 있다. 


실은 자신이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던 발 아래이기에 끝없이 깊은 샘이 자리하고 있다. 추구하는 것이 묻혀 있다. 
그곳에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



어제는 [니체의 인생] 저자인 이진우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지난해 EBS에서 들은 이진우교수의 니체강연을 잊지 못했고, [니체의 인생]을 읽고나서의 미진함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이진우교수의 니체 강연을 들었을 때의 긴장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망치를 들고, 자신을 부수고, 자신의 앞에 놓인 것들을 부수고, 결국 자신의 삶을 부수라는 그의 철학.

나는 그 말에 설득되어 분연히 일어났다. 


질문을 했다.

만약 니체가 2015년에 태어났다면 자기계발서의 저자가 되었을 것 같다고, 

움직이게 하는 무엇이 있다고.

그렇다면 현대인의 철학의 사용범위는 철학자로서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다른 철학자의 말은 현재 삶에서 아주 작은 걸림정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철학적 사고작용?을 하는데 반해

니체의 경우는 마치 자기계발서를 읽었을 때처럼 현재 삶에 강하게 필터링이 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선방향이지만 말이다. 

그게 맞나?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그가 주장하는 내 발 밑이 아니라 그의 발 밑...


답을 했다. 

철학과 자기계발의 차원이 다름에 대해서, 울림의 증폭에 대해서, 개념의 다층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철학의 사용범위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강의는 제 시간을 넘겼고, 질문 시간 또한 제 시간을 넘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누군가 질문을 했다.

영원회귀와 불교의 영향성에 대해


답을 했다. 

그럴 것이다. 니체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심취되었던 철학자이며, 

1800년대 말은 유럽에서 불교 혹은 동양사상에 대해 붐이 일었던 시기라고,

하지만 영원회귀의 긍정성... 을 언급하며 영원회귀와 윤회는 상반된 개념이라고.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영원회귀가 왜 긍정이냐고,

고통 감내, 망치를 들고 자신의 삶을 파괴해나가는 도전, 그런 최선이 무한반복된다는 영원회귀가 왜 긍정이냐고,

더 나은 무엇이 없는 상태를 나는 긍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을 했다. 

너무 이야기가 많아지는 질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이며, 과거가 전진하여 현재를 통과하고 미래를 만나고, 미래의 시간은 현재를 통과해 과거의 어느 시간과 맞닿아있다.

영원회귀....


그런데 그것이 왜 긍정이지?

현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윤회사상과 대립되는 지점이라는 것은 이해되었다. 

윤회사상은 해탈하기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는, 해탈은 미래의 어느때, 목표지점은 미래 어느때.

현재 모든 것의 명분을 해탈, 미래의 어느 시간에 두기 때문....

그것에 반해 니체의 현재 집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긍정이라는 의미인가?


수업이 끝났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무엇때문에 느릿느릿 걸어서 집으로 왔다.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지.

나의 현재는 니체가 아니라 플랫폼 구축이라는 일이니까....

니체는 지금, 현재에 집중하라고 했다. 

니체에게 집중하기 보다 지금 내 발 아래 깊이 묻혀있는 샘을 파는 일에 집중! 

맞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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