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겨듣는 曰(왈)

[허연] 시인으로 산다는 것

by 발비(發飛) 2015. 9. 14.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최적화된 어떤 사람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시인은 숙주 일지도 모른다. …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신이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기다.”
-허연,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찬사,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서(문학사상, 2014)

 

채널예스에서  따다 붙인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를 검색하였는데, 한 달 쯤 전에도 읽었던 인터뷰 기사가 링크되었다.

인터뷰를 한 김도언 소설가는 그에게서 모던니즘의 냄새가 난다며... 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와... 그보다 먼저 까뮈를 이야기했다.

아마 허연 시인을 대단히 좋아하나 보다.

 

일할 것이 남아 도서관에 왔다가 그의 말이 참 좋아 , 그의 말에 꼬리를 달아본다.

흔히 그분이 오신다고 했는데, 그분이 오신다기 보다

시는 마치 달처럼 빙빙 돌다가, 내 몸이 그 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그 분을 바라 보고 있으면 그 분은 내 품으로 들어와 시로 잉태된다는 것이다.

목욕 정갈히 하고, 뒷마당에 정안수를 떠나놓고 비는 여인네처럼 그를 기다렸어야 했었나보다.

 

허연의 시가 몇 달 전부터 좋아졌다.

사실 시를 한참 읽을 즈음에는 그가 시를 쓰지 않았고, 내가 시와 멀어졌을 때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인을 먼 발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시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평소의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그런데

내 몸과 정신이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기다 라고 말한  시인이 말처럼

시를 읽는 독자 또한 시가 찾아 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시 읽기라는 생각 든다.

시인과 독자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요즘 한 편의 시가 좋다.

또 그런데 내 책상 위에는 어쩌다보니, 몇 달 째 허연시인의 시집 두권만 놓여있다.

자꾸 그의 시를 읽게 된다.

 

시인의 삶, 시적 해석이 달린 시인의 삶.

 

회복되지 못할 상처로 삶과 몸이 점철되었을 때라야만 

삶을 시 언어로 정의내리고 싶어지고,

그렇게라도

삶에 장식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채널예스 기사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 서체가 기울림이더니 아무리 바로 세우려고 해도 바로 서질 않는다.

자판을 두드리는 내내 고개가 자꾸 오른 쪽으로 기운다. ;;;;

(하루가 지났고... 다른 컴에서 세웠더니 섰다. 그런데 여전히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머리카락 때문인 걸 알았다.)

 

일을 하다 말고... 일과 먼 이야기를 떠들고 나니, 잠시 소풍을 다녀온 기분이다. 쫌 좋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