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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허연] 길이 보이면 떠나는 것을 생각한다

by 발비(發飛) 2015. 8. 11.

 

#4

당시 도쿄행을 선택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삶과 사랑에 지친 나는 지구 어딘가 칩거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

그러면서도 남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특별 취급하지 않을 곳.

그냥 묻혀서 숨어 있기 좋은 곳


책상 위에 있는, 일이 아닌 책.

습관처럼 출근을 하면 일이 아닌 책의 아무 곳을 펼친다.

나는 작가의 책을 마치 타로카드를 넘기듯, 내게, 오늘, 여행, 을, 선물, 할 페이지의

활자들이 침침하고 피로한 눈을 뚫고 선명한 잔상이 된다.

그 곳에서 잠시 쉼.

 

하나 하나의 문자가 아니라, 아무런 설명없이도 그냥 마음에 닿아 마냥 그 앞에 서 있었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에 걸린 마네의 올랭피아의 그림처럼

나는 침 8시 40분에 #4를 그림처럼 마주하고 한참을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나는 원문을 찾는다.


國境の長い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あった. 夜の底が白くなった.


그가 언급한 번역에 대한 말들, 그는 원래하고 싶은 말을 하지않았고,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 그는 국경에 관한 번역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속에는 딴 이야기가 가득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더 익숙했기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도 그런다.

마음 속에 가득한 이야기는 두고, 입에서 익숙한 마음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공식적이고, 논리적인 말들 그러니까 마음에 미장질 한 번 더 할 말들을 아무 때고 던진다.

작자의 말이 마음이 아니라 싫었다. 마음이 아니라 그냥 말이다.

누군가 내 말이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내 말도 마음이 말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왜소해서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몸에 일본 전통의상을 걸친 아시아 노인이 흰 머리칼을 반짝이면 커다란 백인들 사이에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를 비웃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커다란 두 눈으로 시상대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의 수상 연설은 선배 시인 료칸의 절명시를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내 삶의 기념으로서

무엇을 남길 건가

봄에 피는 꽃

산에 우는 뻐꾸기

가을은 단풍 잎새

 

이 건조하고 황량한 작가에게 서양인은 열광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조용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문학도 눈도 노벨상도 그의 타고난 허무와 황량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시선. 작가의 시선.

누군가의 시선으로 한 곳을 보는 것.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완벽하게 이동하는 것. 그 보다 좋은 문장이 어디있을까?

현재가 아니라 과거라서 완벽재현이 가능한,

문장이 과거라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작가의 시선으로 완벽 재현.

나도 하고 싶다. 완벽 재현. 누군가의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있을 하나의 이미지 완벽 재현하고 하고 싶다.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돼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자신의 모든 걸 바치고 싶은 사랑

그 사라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라는 사랑이, 사실은

두 사람이 따로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은 자기 감정 안에서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짐이 되지 말아야 하며

서로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자유로워야 하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돼라.

둘이 나눠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돼라.

 

눈을 감을 수는 없으나, 따라갈 수 없는 사랑.

눈 앞에 뻔히 두고도, 나아갈 수 없는 사랑.

사랑이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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