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각해보니, 나는 어렸을 때 뛴 적이 없다.
어렸을 때라함은 초등학교를 포함한 그 이전을 말한다.
분명 없다.
운동회 때도 뛴 기억이 없다면, 정말 없는 것이 분명하다.
가슴이 따갑도록 뛴 기억,
뛰면 가슴이 따갑다는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 도전한 10킬로미터 마라톤에서 알았다.
아이들은 뛰는데, 나는 분명 뛴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를 읽다가 뜬금없이 들었다.
뛰었어야 했을 상황 몇 가지.
초등학교 1학년 3월, 전학을 갔었는데, 빨간 깃발을 놓쳐 반을 잃어버렸다.
운동장 저 끝 중앙현관쪽으로 분명 낯익은 담임선생님과 깃발이 보였음에도 뛰지 않았다.
큰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운동장이 텅 비어있었다. 일곱살짜리 나만 있었다.
중앙현관 계단에 걸터 앉았는데, 교장선생님이 몇 반이냐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고 1학년 반을 차례로 돌아보자고 했다.
다행히 나는 1반이었고,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의 늦은 등장에도 아이들과 담임선생님은 아무 일도, 상관도 없었다.
초등학교 내내 여전히 뛰지 않았다.
숨바꼭질도 고무줄도 하지 않았던 나는 뛸 일이 없었다는 것이 맞다.
중학교 3학년 체력장.
그 때쯤 나는 심장이 안 좋았다. 이불만 개고 나도 숨이 차서 벽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800미터 오래달리기는 물론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도 뛰지 않았다.
뛰기는 했지만, 뛰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매달리기나 윗몸일으키기는 열심히 했다.
던지기와 멀리뛰기는 열심히 하는 것과는 다른 분류로 안되었다. 제자리 던지기, 제자리뛰기...
나는 누구나 만점을 받는 연합고사 체력장 점수를 18점 받았다. 20점이 만점이었다.
만점을 받지 못한 아이는 전교에서 두 명이었다.
체력장에 참가하지 못한 아팠던 아이, 동민이... 동민이는 체력장이 있었던 다음달에 하늘나라로 갔다.
아무튼 동민이와 나.
고등학교때도 별 기억은 없지만, 뛰지 않았다. 계속 뛰지 않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서 숨이 끊어지도록, 가슴이 말라 따갑도록, 터지도록 뛰었다.
여전히 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왠지 뿌듯하다.
나는 왜 갑자기 이 책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달리기, 뛰기에 대해 생각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심증 가는 것이 있다.
어제 권대웅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읽은 '키르티무카'
요즘 나를 가끔 멍청하게 사로 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 키르티무카
욕망과 자아...
까닭없이 늘 허기에 시달려 아무것이나 먹으려하는 괴물이 있었다. 그 괴물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자 막강한 힘과 권능을 가진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에게 애원을 했다.
“제발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주세요”
그러자 시바 신이 말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네 몸을 먹어라”
그러자 이 괴물은 스스로의 몸을 먹어치우고 얼굴만 남겼다. 스스로를 먹어치운 괴물의 이야기. 허기와 허상을 없애버린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라하여 시바신은 그 괴물을 ‘키르티무카’ 즉 영광의 얼굴이라 칭하고 시바 신에게 오는 입구에 그 얼굴을 세웠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키르티무카, 영광의 얼굴. 우리는 자신의 허기까지 먹어치우는 영광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권대웅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보통의 존재>, 키르티무카, 뛰기....닮았다. 그것들의 남아있는 것이 같다.
보통의 존재....대체 흥분이라고는 없는, 이미 없는, 다 날아가고 없는 바삭바삭한 영혼
키르티무카...생존의 역설, 욕망의 잔해, 최후에 남은 자아.
뛰기...점점 사라져가는 몸 혹은 점점 무거워지는 몸. 뛴다는 오직 하나.
그리고...
인생이라고 불리는 삶 끝에 남을 죽음 직전의 목숨,
한때 아파하며 읽었던 <목숨>--박진성 시집.
박진성, 나는 2005년 그의 시집을 읽으며 시인이 죽을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일련의 생각고리 끝에 그의 생사여부를 체크한다. 2013년... 용케도 그는 살아냈다. 키르티무카처럼....
알아보니, 시집은 개정판이 나오고, 산문집도 나왔다. 용케도 살아내었다. 키르티무카처럼....
생각이 꼬리를 무는 날... 그 끝, 박진성 시인의 '대숲으로 가다'
우리 모두는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처럼
나도, 그들도 모두 시간을 보내고, 흘려....나도, 그들도 모두 보통이 되었다. 되고 말았다.
.
.
되고 말았다.
대숲으로 가다 -1996
박진성
눈을 감으면 보였다 근처 대나무 숲
또 밤이 오면 눈발이 대나무에 달라붙었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간호사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대나무에 달라붙어 옹이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칼날 같이 빛나던 빙판길에서
어머니는 울었다 거리가 온통 병실이구나
마구 자빠지는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고
아침의 꽃다발 속에서 아무것도 부활하지 않았다
화자복에 가죽점퍼 걸치고 버스를 타면
금강의 물빛이 달려들었다
대청호가 여기서 멀지 않은데...그 해 겨울,
대나무를 깍아서 竹刀를 만들었지만 간호사가 자꾸만
빼앗아갔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날카롭게 빛나는
주사바늘 끝에서 아침 빛다발이 쏟아졌다
또 밤이 오면 눈발이 침대에까지 쏟아졌다
창문을 닫지 말아요 나는 금강으로 가야해요,
대숲의 바람소리 병원에 부려놓으면 의사는
나보다 작아졌다 작아져서 흰 알약이 되었다 어머니,
나는 詩人이 되야 해요, 책갈피를 견디지 못한 종이가
침대 밑으로 쏟아지면 어머니는 종이들을 내 몸에
덮어주었다 네가 입을 옷이란다
또 밤이 오면 바람 부는 대숲으로 갔다
날카롭고 뾰족한 대나무는 스스로 칼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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