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박웅현] 여덟 단어

by 발비(發飛) 2013. 9. 12.

 

 

첫 사랑

 

김용택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 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 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그제, 어제, 오늘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었다.

 

"연애하세요?"

 

그제 오랜만에 만난 작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풋! 하고 웃어넘겼다.

어제 얼마전 퇴사한 직원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왜? 그렇게 말하지? 하고 반문했다.

오늘  옆 방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소개도 안 시켜주며 왜들 난리야! 하고 발끈했다.

 

"이 반응은 뭔가요? 진짜 같은데요. 평소 같으면 댓구도 안 하셨을텐데 이러는 걸 보니 확실하네요." 그런다.

 

무엇이 그렇게 보인걸까? 괜스레 억울하다.

가을이라 새로 꺼내입은 검은 니트때문에 그런가? 설마 진짜 이뻐지기라도 했나.

이런저런 추리를 하다가, 이런 궁리를 하는 것조차 바보같은 짓이다 생각이 들어 머리를 흔들어 생각에서 벗어났다.

 

최근 재미있게 읽기 시작한 박웅현의 [여덟단어]라는 책을 점심시간에 이어 읽었다.

 

작가는 김용택 시인의 <첫 사랑> 이라는 시를 인용하고는

정말 좋다고... 그리고 우리 모두 솔직히 인정하자고까지 한다.

사랑은 언젠가 다 낡고, 시들어가고, 뭐.... 그렇게 사라져가는 거라고.

맞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김용택시인은 좀 달리... 한 가닥 희망을 준 것이라고 한다.

사랑이 시드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을 잃고, 사랑을 잃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과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란다.

 

쬐금은 나은 거지.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므로....그럴 것이다.

 

이걸 희망이라고 말하는 구나.

절박함의 절정인가? 아쉬움의 절정인가? ;;;;

후훗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구나.

 

박웅현은 다시 빅토르 위고의 글을 인용한다.

 

"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다시 확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랬던 것 같다.

바로 그 놀라움을 잃은 것이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래서 점점 내가 낡아가고 빛을 잃어간다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잠시 대책을 생각해본다.

 

이번 가을에

산으로 가 하얀 쑥부쟁이의 흐드러진 아름다움에 놀라고,

푸른 동해바다로 가 키만한 하얀 파도의 힘참에 놀라보고 ,

가고 오는 길에 만날 노란 은행나무에 놀라고,

서쪽 산 너머로 넘어가는 세상 무엇보다 붉을 해에 놀라고,

그렇게 깜짝깜짝 놀랄 생각을 한다.

생각만으로도 반짝거린다.

이렇게 이번 가을에 잃어버린 놀라움의 오감훈련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또 다른 생각을 해 보면,

잃어버린 사랑뿐만이 아니라 낡아가는 것에 손 닿지 않으면 세상 어느 것도 아름다울 리 없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아름답지 않은 것을 곁에 두기는 싫다.

색이 바랜 것은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옆에 두기는 싫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즐겁고 평화로운 것만 두고 싶다.

그것은 오랜 소망이다.

그래서 나도 낡은 것들을 외면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낡아가는 것에 손길이 자주 닿으면 아주 자연스레 윤이 난다.

부지런한 종부를 둔 고택의 대청마루가 그렇고,

오래 되었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길 잘 든 가죽가방이 그렇다.

 

낡아 가는 것에 손이 닿아 윤이 나면 그보다 품위 있는 것 또한 없다.

아우라까지...

 

낡아 사라지고,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을 아깝게 여긴다면, 이제 방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말에 힌트를 얻어 놀라움, 경이로움에 자주 내어놓는 것이 방법인 듯 하다.

낡아 사그라지고 있는 것들이 다시 은은한 빛을 낼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 순간 거대한 우주가 되어버리는 황당함을 경험하는 것보다 훨 낫지 않을까?

 

결심했어! 난 이걸로 할래!

 

은은한 윤潤!

빛에 반응하는 윤潤!

물에 반응하는 윤潤!

움직임에 반응하는 윤潤!

 

 

내가 바다를 한 번 더 볼 때

바다는 나를 본 것일까 아니면 보지 못했을까?

                                                  -네루다 <질문의 책> 49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