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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타로

by 발비(發飛) 2013. 10. 7.

피 터지게 깨고 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지금이 지를 때이다.

당신은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써봐라.


 

-------2006년 여행일기 중

 

그 날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 나는 파키스탄 훈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정한 것도 없는 채 히말라야 협곡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드레쯤 지났을 때였을까?

그는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무슬림 남자들이 입는 꾸그다삐자마를 입고,

협곡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스물아홉? 서른쯤.

호주에서 워킹할리데이를 하고, 

거기서 번 돈으로 지구를 서쪽으로 돌아 아프리카, 영국, 유럽, 터키...등을 거쳐 파키스탄 훈자까지 1년에 걸쳐서 왔다고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서로에게 좀 익숙해질 무렵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소원을 빌다가,

자신은 타로점을 봐서 여행경비를 썼다는 뜬금없이 말을 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타로점을 볼 수 있다고...

의자를 잔뜩 젖히고 캄캄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와 유성을 하염없이, 멍청히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카라코람하이웨이를 타고 중국에서 넘어온 연극배우 두 명,

이집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던 한 명,

나와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던 한 명,

그리고 나는 차례로 그가 시키는 대로 타로카드를 넘겼다. 

 

다들 이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타로카드를 넘기면서 내 운명이 어떻게 될까, 엄청 떨었던 것 밖에는...

 

나의 기억에는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그의 대답은 시작과 같이 불현듯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가서의 삶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고,

아마 그의 대답은, 2006년 일기를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나보다.

 

피 터지게 깨고 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지금이 지를 때이다.

당신은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써봐라.

 

새삼스럽게 그의 답을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믿었던 듯 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긍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운명이라는데 왠지 약간은 섭섭했던 것 같다.

옆에 있던 애들이 그랬다.

 

원래 그렇구나...,

 

나... 원래 그래!

 

 

 

멀리 떠나서야 겨우 마음이 펀하니 이상한 사람
바람 많은 날이면 펄펄 더 자유로울 수 있으니 다행인 사람
걷기, 콜롬비아 커피, 눈, 피나바우쉬, 찬 소주와 나무 탁자
그리고 삿포르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넘치는 사람
아무 정한 것도 없으며, 정할 것 또한 없으니 모자란 사람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표1

 

아침에 여행에세이를 찾다가

내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끌림>, 이병률시인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표1를 읽다가

몇 번을 보고도 지나쳤던 표1에 꽂혔다.

아무 정한 것도 없으며, 정할 것 또한 없으니 모자란 사람

이 부분을 읽는데, 여행 중에 만나 내게 타로점을 봐 주었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그의 말 때문인지,

그가 예견한 운명때문인지,

나는 남은 일정을 모두 접고, 급하게 돌아와 시를 쓰고, 일을 시작했다.

정한 것도 없이, 정할 것도 없었는데, 마치 정해진 것처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지금 무엇때문에, 혹은 이유없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지금 알고 있는 것들 때문이다.

비록 7년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내게 규정된 모든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마음이, 가슴이, 내가 변한 것은 없고, 다만 몸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 뿐...

그때 그랬다.

그래 난 원래 그래. 그러니 그렇게 사는거지 뭐.

지금까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써봐라.

지금이 지를 때이다.

 

오늘 아침 이병률시인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미리보기를 읽은 것, 참 다행이다.

그로인해 내 기억속에 묻혀있던 작고 알찬 돌멩이 하나 꺼내 반질반질 닦아 

내 마음 속에 잘 챙겨놓은 느낌이다.

 

좋군!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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