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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밥상

by 발비(發飛) 2013. 8. 23.

오늘 난 밥상을 차릴 것이다.

나의 부재의 기간 동안 일들을 잘 해준 부서원들을 위한 감사의 밥상이다.

 

 

몇 주 전, 홍대 근처의 '불이야'라는 중국식 샤브샤브 허궈집에서 부서회식을 하였다.

허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라면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 음식으로 

근데 아주 오랜만에 먹는 것이라 기대하고 기대하며 밥상을 차려지길 기다렸다.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각종 향료가 듬뿍 들어간 빨간색 국물도 맛있었고, 맑고 담백한 하얀국물은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해장하는 기분이었다.

납작당면은 개인적으로 핵심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쫄깃한 식감이 최고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언제나 그래야 하는데....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건강한 사람에게 큰 즐거움입니다. 식사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일에서도 즐거움을 찾지 못하며 어떤 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j 엘리엇

 

 

며칠 전, 친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사서 먹어도 되지만, 고마움의 표시는 뭔가 아나로그적이어야 한다고 해야하나.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한단계 정도의 조리만으로 상차림이 가능한 메뉴로만 선택하고 준비했다.

 

두부는 썰어서 그냥,

오리고기는 전자렌지에 돌려서 그냥,

야채들은 씻어서 소스를 얹고 그냥,

회는 마트에서 준 것 그대로 그냥,

가지는 소금과 후추만 넣고 구워서 그냥,

난이도가 라면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미소된장국만 조리를 거쳤다.

 

노력과 수고에 비해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메뉴가 강렬한 양념맛이 아니었고,

각기 따로 먹기도 하고, 가지와 두부, 가지와 오리, 오리와 두부 .. 등과 같이

여러 조합으로 먹을 수 있었기에 아주 천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오랫동안 먹었다.

 

맛과 밥상이 평화롭다 느껴졌다.

 

 

(서명된 블로그에서 퍼 온 사진)

 

밥상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작년에 포스팅한 제주 꿈꾸는 섬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틀동안 먹은 아침밥상이다.

 

태풍이 와서 고립되기도 했고,

날이 습해서 향이 짙기도 했고,

혼자 여행길이었고,

그래서 인지 몰라도 아침에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리는 달그락 소리와 향은 너무나 특별했다.

느림 그 자체, 매 순간 오감이 작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아이 엠 러브]의 여주인공이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던 장면이 생각난다.

교감이다.  

먹는 것에 그리 집중하지 않았던 나는

너무나 간단한 음식으로도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처음으로 실감했다.

먹는 것이 아니라 주고 받는 것이라는 간단한 경험이 없었던 탓이라는 생각이 지금 막 들었다.

이상하다... 내겐 왜 엄마의 음식이 그렇지 않지?  

아무튼 그때  난  황지우 시인의 거룩한 식사라는 시를 커피와 토스트를 먹으며 떠올렸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그러고보니, 집에서 먹지 않으므로 식탁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여 접어두었던 식탁을 싱크대 옆 쪽으로 다시 셋팅시켰다.

집에 들른 동생이 그걸 보고, 먹고 살려고? 하고 묻길래, 어! 먹고 살려고! 그랬었다.

친구와의 저녁식사도 그 식탁에서 먹은 것이로군. 밥상이군.

 

어제 몇 가지 장을 봐 두었고, 오늘 퇴근을 하면 삼십분 안에 밥상을 차리는 것이 목표이다.

언제나와 같이 그 밥상은 단조로와 나는 아주 빠르게 차릴 것이다.

하지만 맛은 단조로와 아주 느리게 먹게 될 것이다.

 

요즘 들어 기쁜 마음으로 밥을 잘 먹는다.

 

너희가 부자라면 기쁠 때에 먹도록 하여라. 너희가 가난한 자라면 먹을 수 있을 때에 먹어 두어야 한다. -디오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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