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중산간 도로의 동남쪽에 <두모악갤러리>라는 곳이 있다. 2011년 그곳은 단장에 단장을 거듭해 전시실이 세 개나 되고, 찾아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한마디로 제주도의 명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두모악 갤러리>에서 살았고, 손수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찍은 김영갑 사진작가가 쓴 책이다.
이 책에는 그가 앓고 있던 루게릭병이 깊어져 삶을 가늠하기보다 죽음을 가늠하는 것이 훨씬 가까운 상태임이 곳곳에 보였다. 책의 내용은 진솔하고, 진지하며 담담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책보다 죽음의 자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보이는 죽음에 대한 진지함은 사는 동안의 진지함과 맞물려 있었다. 그는 이 책을 내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가 그려놓았던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나는 다시 죽음에 대해 꽤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 몇 달 후 <두모악갤러리>를 비롯해 그가 사진을 찍었던 곳들을 찾아다니는 보름일정의 여행을 하였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구도를 잡아놓고는 며칠이고, 몇 달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한다. 그의 사진에는 그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바람이 있다. 그의 족적을 따라간 마지막 지점이었던 마라도에서 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며칠씩 오지도 가지고 않고, 먹지도 싸지도 않고 벼랑에 매달려 기다리기만 했다고 한다. 마라도에서 그가 사진에 쏟은 열정에 관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밤새 이어졌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맞았을 죽음에 대해 끈덕지게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삶의 의미나 깊이가 죽음의 그것이었다.
필립 퍼키스는 <사진강의 노트>에서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통틀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이 머무름과 반대 선상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빛, 공간, 거리 사이의 관계, 공기, 울림, 리듬, 질감, 운동의 형태, 명암… 사물 그 자체… 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든 아직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성적이지도 않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라.’라고 했다.
그의 사진을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그의 사진에서 어떤 기미가 올라옴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만이 그 시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볼 때에도 머물러야 함을, 시간에 머무르면 공간이 생기고, 그곳에서 바람이 일고, 해가 뜨고 진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굳이 ‘필립 퍼키스’를 언급한 것은 김영갑 사진작가는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었으며, 그의 사진은 그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으로 사라진 제주의 모습을 기록으로 담았으며, 나는 그가 쓴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으면서 수평선 저 너머 이어도로 사라진 그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사진을 보면서 예술가의 진정성은 삶의 진정성에 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예술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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