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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칼린 지브란] 눈물과 미소

by 발비(發飛) 2011. 3. 11.

이 날 고요는 갈등과 투쟁으로 가득 찬 삶의 거대한 손 안에 나를 맡기었습니다. 그날 시간은,

낯설고 두려운 삶이라는 책 속에 나를 한 단어로 기입해 놓았습니다.

그 단어는 때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것을 뜻하기도 하는.

-K.지브란/ [눈물과 미소] 중에서

 

어제는 나의 생일이었다.

3월 10일.

참 오랜만에 3월 10일 이라는 날짜가 도드라지며, 오래된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초등학교(나는 국민학교를 나왔지만;;)를 다닐 때,

중학교를 다닐 때,

고등학교를 다닐 때,

예나 지금이나 낯을 가려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던 내게 아버지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 생일파티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꼭 데리고 와라.

하지만 나는 한번도 친구와 생일파티를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3월 10일이기 때문이다.

학년이 바뀐지 겨우 일주일 밖에 안되는 시기였다.

나의 재주로는 일주일만에 친구를 초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년이 바뀌면, 교실에 앉은 아이들을 보며

누구를 생일에 초대해야지, 하는 고민스러움으로 친구들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자연스럽게 사귀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대할 친구를 고르는 눈으로 먼저,,, 보았던 것이다.

대학에 가서야

아이들이 바뀔 일이 없으니, 친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지난 주에 마치 새학년이 된 것처럼 새 회사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딱 일주일 만에 생일이 된 것이다.

같은 사무실에 생일 같은 팀장이 있었다. 태어나서 나와 생일이 같은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워낙 장기근속자라 모두들 그 팀장님의 생일을 축하했고, 축하를 받았다. 내 눈 앞에서...

나도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생일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종일 학교때 나를 정말 고민스럽게 했던 생일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지나갔다.

 

퇴근 무렵,

마케팅팀의 발랄한 팀장님이 생일인 팀장님이 방에 있는 줄 알았는지,

평소에 절친이었던,

약간의 율동이 들어간 축하세레모니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생일인 팀장님은 벌써 퇴근,

마케팅팀 팀장님은 허탈해하면서도 흥에 겨워 축하세레모니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축하세레모니의 좋은 기운이 공중으로 펄펄 날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그거 저에게 해주세요. 저도 생일이에요."

퇴근하지 않은 같은 사무실 사람들이 당황하며, 축하한다며 미안해한다.

"아니 아니요, 제가 말하지 않은건데요."

정말 그 환하고 씩씩한 세레모니를 받고 싶었다.

 

그랬다.

 

친구 몇명이 전화를 해서 축하한다고 했었다.

부모님이 전화를 해서 축하한다고 했었다.

전 직장 총무팀 직원이 문자로 축하한다고 했었다.

생일축하 쿠폰을 준다는 문자가 왔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나를 향해서가 아니었지만, 바로 앞에서 축하 축하.. 하는 그 말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냥 허공에 날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코 앞에서 함께 있으며 공기를 나눠마시는 자들이 주는 에너지는 달랐다.

그것이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분명 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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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북부의 베챠리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산세가 매우 험한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험한 산세 덕분에 터키 지배하에서도 자치구역으로 남았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생업이던 대상(caravan)을 통한 동서교역이 타격받고 주민들은 가난과 터키의 폭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회 교육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싹튼 지식인들은 아프리카,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칼릴 지브란의 가족도 이러한 이민자들의 무리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895년 12세 때 아버지만 레바논에 남고 전가족이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2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와 5년간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수학했다. 그후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1902년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인생체험을 쌓았다.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을 만나 3년간 미술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이민온 어머니와 누나, 형이 결핵으로 죽고 누나와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보스턴의 한 출판업자의 도움으로 북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때부터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으며, 당시 문단에서 활약하는 젊은 작가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작품활동을 하게 되었다.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씌어진 산문시들과 희곡작품들이다. 희곡은 모든 아랍권에 널리 알려져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23년, 20년간의 구상을 거쳐 완성한 원고를 출판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영어로 기록한 산문시 《예언자 The Prophet》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여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는 《예언자》는 아랍어로 쓴 소설 《부러진 날개 The Broken Wings》(1912)와 함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미국의 시리아계 신문에도 기고했으나, 《예언자》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저작들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삽화로 실린 경우가 많다. 초상화를 비롯한 그의 그림은 철학을 느끼게 하는 독창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는 것으로서 웅장하고도 경이로운 레오나르도적 특질을 보여준다는 평을 얻었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최초의 전시회를 가진 이래 뉴욕, 보스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메리카의 보헤미아라고 불리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예술활동에만 전념하면서 늘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주장하고, 레바논의 종교적 단합을 호소했다. 평소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알코올로 달래다가 건강을 해쳐 뉴욕의 성 빈센트병원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특한 종교적·역사적 배경에서 성장하여 일생을 아랍과 비아랍, 이슬람과 기독교, 레바논과 뉴욕 등 이질적인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 특유의 이중적 세계관으로 전세계의 독자들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현대인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는 1975년 처음 번역되어 국내 독서계에 칼릴 지브란의 붐을 일으켰던 산문시집 《예언자》를 비롯하여 첫사랑을 주제로 다룬 소설 《부러진 날개》, 잠언집 《모래 ·물거품 Sand and Foam》(1926), 우화집 《방랑자》(1932)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Prose Poems》《세월 Time and Tide》《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등 많은 작품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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