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박상순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 밖의 봄볕 대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을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너를 닮은
물렁물렁한 시냇물, 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 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훨 좋을런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한 것이겠지.
의지, 의식, 이성, 판단, 가치....그리고 감정까지 넣을까...
특별할 것이라며, 인간의 주성분이라며 신이 만들어주신거지.
인간이 가진 것들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무생물이면서 살아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
되돌려놓으소서.
어쩌면 오직 한 마음이다.
다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인간이다.
사랑하는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이다.
나의 모두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이보다 더 불행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원한다.
그렇게 이상하게 꿰는 것이 인간이다.
말이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시냇물을 보고도, 꽃을 보고도, 밤고양이를 보고도, 햇살아래서도, 바닷속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우고 검은 때를 남기는 인공딸기향 고무지우개를 원한다,
끊임없이 아파도 고통이 뭔지 모를 것이다.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훨 좋을런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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