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을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때로 나는 내가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감지 할 때마다 섬뜩함을 느낀다.
치열함으로 점철된 삶.
언제부터일까?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인가? 아니다.
나의 삶을 구원해주셨다고 믿었던 고1때 담임선생님의 말씀
"니가 웃으면 100미터가 환해져. 그래, 웃어." 라고 했던 그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때 삶이 처음 내게로 왔다.
그리고 그 이후, 한순간도 치열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 말을 들었던 때, 삶을 처음 접한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이것은 마치 시인이 말하는 고래를 닮은 사랑처럼 그렇게, 한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삶을 쫓았다.
삶에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살 때조차 마치 정화수을 떠놓고 빌었던 비녀 찌른 할머니처럼 나도 몰래 빌었다.
그렇게 삶이 나를 잊지 않도록 빌었다.
그리고 내가 삶을 잊지 않도록 빌었다.
얼마나 많이 열망하였던가.
내가 삶과 함께 삶을 누리기를...
내게 삶을 불러들인 한 순간, 그 기억처럼.
이제 삶이 아닌, 삶을 쫓기만한 시간이 지나고 있다.
나는 파도치는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치맛자락을 적신 채 고래가 오기를 한없이 기다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래 대신,
태양빛에 파도그늘이 마치 고래인 듯 검은 빛을 가끔씩 드러낸다.
그 때마다 오금이 저리도록 발꿈치를 들었다.
삶을 기다렸다.
고래는 없다.
고래가 오지 않는 바다가 있듯 삶이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저, 마치 검은 파도 그림자가 고래인듯 그 신기루를 모른 척하며 쫓으며 바다 끝을 달린다.
파도가 일 때마다 까르륵 웃으며
파도가 일 때마다 고래의 지느러미 끝이라도 닿은 듯 몸을 오그리며
타인들의 삶이 나를 칠 때마다 모른 척 슬쩍, 낚아채며...
이제 고래가 온 들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거다.
다시는 긴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삶이 내게 손을 맞잡자 하여도
삶 속에 있는 이들이 손을 끌어당겨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안에 삶이 없음을...
내 어느 삶의 원죄 때문에 삶은 그 곳에 있다.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삶 너머 삶,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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