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나의 모든 배터리가 나갔다.
핸드폰의 배터리는 오전 11시즈음 문자메시지를 나누다가 배터리 알림칸을 완전히 비우더니
5초정도를 깜빡거리다가 나가버렸다.
그 뒤를 이어 회사용으로 사용하는 핸드폰.. 점심시간까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오후 두시를 조금 넘기면서 그동안 한통의 통화도 하지 않았음에도 배터리가 다 되었다는 경고음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한시간 반이 넘는 출퇴근길을 위한 pmp...
하이퍼덱 나다에서 온 메일에서 강렬히 보고 싶은 영화를 발견, 그 영화를 다행히 찾아 다운을 받아야지 하고
가방에서 꺼내었더니, 출근길에 껐다고 생각한 pmp가 아직도 켜져 있다. 한 칸 남은 배터리를 보면서 혹시나 하고 컴이랑 연결을 했지만,
low battery가 뜨면서 불가하다고 뜬다. 그것마저 잠시 컴이랑 연결해다고 바로 나가버렸다.
내가 휴대용으로 갖고 있는 물건들의 모든 배터리가 나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길도 없다.
배터리가 사라지면서 순간,
나는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
나가버린 배터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 문제는 나의 휴대용 디지털기기만의 배터리만 나간 것은 아니었다.
지지난주부터 심하게 앓고 난 뒤,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기진맥진이다.
점심시간 회사의 윗분은 요즘 해롱거리는 나를 위해, 연로한 나를 위해,
한강에서 낚시라도 해서 장어를 한 마리 통째로 먹어야 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하며 반은 놀리듯 반은 걱정하듯 말씀하셨다.
어제 간만에 만난 친척언니는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자꾸 먹을 것을 권해 밤새 거북한 속때문에 괴로웠다.
그제 한 열흘만에 간 학교 교수님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기가 빠졌다며,
자신의 기라도 줘야겠다면 몇 번이고 손바닥을 내밀라고 하시며 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니까 나의 휴대용품만 배터리가 나간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배터리가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휴대용품만 충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충전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밤이면 나의 정체성이 되었던 것들은 콘센트에 나란히, 전선들이 엉킨 모습으로 붉고 작은 불빛을 내며 충전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그 모든 것들은 문제없이 그 소임을 다 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나는 더이상은 허전함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 나의 배터리 또한 어느 정도 충전이 된 듯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배터리의 일정부분은 그것들의 배터리와 어느 정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 그 모든 것들을 콘센트에 꽂는 것이다. 그럼 나는 조금 더 충전된 것 같을 것이다.
....
그럼 나도 기계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발라버려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버려 김밥에 참기름을 발라버려
찬밥을 라면국에 말아버려 비빔밥에 고추장을 발라버려 삼겹살에 쌈장을 발라버려
다 발라버려 발라발라버려.........
난 한방을 노려 난 한방을 노려 지더라도 상관없어 다음 판을 노려 난 갈때까지 갔어 ... 나는 참을만큼 참았어.....
.... 발라라 발라라 발라버려......
(드렁큰 타이거 8집, '몬스터' 중에서)
최근에 발매한,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cd를 산 드렁큰타이거의 8집 2cd, 첫곡인 몬스터의 가사이다.
닮았다.
난 내 안의 배터리가 나간 것을 ,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충전가능한 디지털기기들의 충전으로 발라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발라도 내 낯빛은 달라진다.
마른 입술이 달라지듯, 김밥이 달라지듯, 찬밥의 때깔이 달라지듯, 비빔밥의 때깔이 달라지듯,
배터리는 바르는 것이 나의 때깔이 달라지기도 할 것 같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은 발라 버려야 한다. 감쪽같이....
내 배터리는 초록의 때깔은 전신에 풍기며... 탱탱해 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 유유히 초록의 때깔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발라 발라 발라... 발라버려!
배터리로 발라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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