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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그림자가 되어 들여다본다

by 발비(發飛) 2009. 6. 18.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림자가 되어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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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저녁으로 보는 거울이지만,

얼굴에다 바르는 것들이 잘 묻었나만 보았을 뿐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누나는 이쁘십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유일한 회사동료가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다.

립서비스가 아주 독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때마다 입이 찢어져라 좋아한다.

 

어제도 거의 탈진의 지경에 내가 힘이 없다고 말하니, 그는 여지 없이 아름다우십니다. 이쁘십니다.. 고 했다.

웃었다. 그리고 힘이 난다.

 

독한 립서비스덕분에 잠시동안 급 충전되는 느낌이었으나, 워낙 방전이 많이 되어서인지 회복이 되지 못한채 퇴근을 했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거울을 보았다. 그냥 거울이 거기에 있어서...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쁘십니다...아름다우십니다...

 

거울 안에는 윤기라고는 없는 피부에

팬더곰같은 다크써클, 하나의 빈틈도 없이 빼곡히 올라온 잡티, 볼살이 빠지면서 드러난 광대뼈, 퀭해서 마치 수술한 듯 잡혀버린 쌍꺼풀...

거울... 저것을... 싫다...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생각을 해봤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내 눈두덩이가 멍든 듯이 다크써클이 생기면 기뻤었다.

내가 무엇엔가 열심히 몰두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눈밑에 까맣게 생긴 주근깨를 보면 보람찼다.

그것은 여자라면 두려워하는 자외선과 아랑곳하지 않고 사막을 건너고, 산을 올랐다는 증거니까.

 

광대뼈와 함께 드러난 턱선을 만나면 행복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브이라인은 되지 않더라도 얼굴이 작은 수척한 여자라는 증거니까.

 

마지막으로 진해진 쌍꺼풀은 최고다.

눈이 커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선명해 보인다는 증거니까.

 

어제 내가 발견한 증상들은 과거 어느 지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이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가 이쁘다는 말을 하는 순간은 나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했을테고, 그렇다면 내 얼굴을 보았을텐데...

말이 아니라 그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이쁘다는 말을 하는 순간에 내 얼굴은 어떻게 변했으며, 내 마음은 무슨 생각으로 좋아했을까?

그런 것들이 왜 내게 문제가 되는거지?

뭐가 변해서 얼굴이라는 것에, 이쁘다는 것에 반응을 하고 생각이 머무는 것이지?

 

여자

 

난 노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20대때 나의 소원은 마흔살이 되는 것이었다.

마흔이 되면 인간만 남고 남자 혹은 여자의 구분을 포함한 모든 구분을 위해 모난 것들이 둥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굴러가고 싶은데,  모난 것들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내게 여자는 모난 것 중에 하나였다.

 

지금 난 둥글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 얼굴에서 발생한 노화현상들은 그것이 더 심각해질 시점이면 아마 여자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런데 거울 앞에서 절망을 느꼈다.

처음으로 강열하게 여자라는 사실을 감지한 순간이었다.

 

거울에서 찾은 것은 그림자이다.

이제 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원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나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발끝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나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것과 내가 바라보는 눈길들과 내가 향하는 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니시와키 준사부로라는 일본 시인의 시 구절에

 

나중에 그 그림을 여자가 그린 것

이라고 알게 돼

그래서 여자가 나왔구나

바위에서 스며 나는 여자 마음의

민들레

 

라는 구절이 있다.

 

거울 앞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여자를 보는 여자의 그림자.

여자와 발이 붙은 여자의 그림자.

여자에게서 나온 여자의 그림자.

여자의 키만큼의 거리를 둔 여자의 그림자.

여자를 비추는 햇빛에 따라 키가 크고 줄어드는 여자의 그림자.

 

난 여자가 아니라 이제 여자의 그림자가 되고 싶다.

 

그 그림자에게는 선은 없고 면만 존재할 것이다.

여자에게서는 무엇도 키울 수 없었지만, 여자에게서 나온 그림자는 무엇이든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서 나온 그림자의 시선으로 본 여자야 말로 남자와 사랑하는 순간보다 더 여자라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같은 여자일지라도...

 

'누나한테 이쁘다는 말을 하고 싶으면 내 그림자에게 말해라.'

라고 말해줘야지.

 

멋지지 않은가?

덜 떨어진 여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보다, 여자에게서 재생산된 그 여자의 그림자로 산다는 것,

그 여자를 끝없이 바라보며 그 곁에 있어준다는 것,

다시 한번 니시와키 준사부로의 말을 주절거려본다. 그래서 여자가 나왔구나.

 

매일밤 거울을 보렴.

거울을 보는 너에게 괜찮아... 하며, 어깨를 두드려줄께. 그것이 필요한 거야.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을밤은

마루에 한 송이 꽃 그림자가 있다

갖가지의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마음 새파랗게 질리는

몹시 쓸쓸함

'옛 병풍의 풍속도 속에 있는

여우 같은 것

산놀이하는 여자의 눈

벚나무가 구름 위에 반쯤 뵈는

절간의 지붕

가을의 눈썹 같은 풀잎

생각 남는다

 

'당의를 입고 있던 시대의

여자의 배꼽이 보고 싶다고 한

여자가 있다

가을의 씁쓸함'

 

누군가 엿듣는자가 있다

 

'[서풍을 보냄]이란 시를 남긴

시인의 초상은

그 너무나 마음 약한 그 시인을

오래 싫어했지만

나중에 그 그림을 여자가 그린 것

이라고 알게 돼

그래서 여자가 나왔구나

바위에서 스며 나는 여자 마음의

민들레'

 

-니시와키 준사부로, 나그네는 돌아오지 않는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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