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적어도 산도르 마라이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며칠 전 읽었던 [열정]이 압도하고 있고, 간간히 산문집 [하늘과 땅]을 짬짬히 훔쳐 읽고 있는 중이다.
그는 삶, 특히 사랑을 대할 때 '관조(대상을 논리적 사변에 의하지 않고 직접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적으로 대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감정의 기복없이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장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 때 나의 경우에는 그냥 끌려들어갔다.
에스더는 자신이 죽어간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43살에 있었던 어느 하루를 회상한다.
43살 기점에서 20년전 라요스를 만난 그 하루에 있었던 일이다.
라요스는 한마디로 뻥쟁이(이건 귀엽게 표현한 것이고, 사깃꾼이다)이다. 이 사실은 20년전이나 현재시점이나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자신과 그의 딸 조차도...
라요스는 20년전 라요스를 사랑하고, 라요스도 사랑했던 에스더를 배신하고 에스터의 언니와 도망을 가서 결혼을 한다.
그 결혼전부터이기도 했지만, 현란한 화술과 태생적 친화력으로 에스더 아버지의 재산들을 다 탕진시킨다.
언니 빌라의 죽음전후에는 더욱 심해져 에스더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는다.
다행히 주변인의 도움으로 근근히 20년을 살아왔는데... 라요스가 나타난 것이다.
직감으로 라요스가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라요스는 에스더에게 빚을 갚을 것이 있다고 제 논리를 편다.
"사실 당신은 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소. 반박하지 말아요.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오. 용감하게 사랑해야 하오. 도둑이나 앞날의 계획. 천상과 지상의 그 어떤 율법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랑해야 하오. 우리는 서로를 용감하게 사랑하지 않았소...... 그게 바로 문제였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었소. 남자들이 사랑에서 보이는 용기는 하잘것 없기 때문이오. 사랑, 그것은 당신네 여자들의 작품이오. 사랑할 때 당신들은 위대하오. 그런데 당신은 실패했소. 그리고 당신이 실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든 것도 물거품이 되고 의무와 임무, 알맹이 없는 삶이 되고 말았소. 남자들이 사랑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은 맞지 않소. 당신들이 영웅적인 사랑을 해야 하오. 그런데 당신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소. 당신은 자존심이 상해 도망쳤소. 이제 내 말을 믿소?"
이 부분을 읽을 때 온 전율이란.. 이것은 산도르 마라이의 힘이다.
라요스는 사깃꿈인데.. 그가 한 이 말은 뭔가?
라요스는 에스더의 언니와 결혼을 하기 전에 세번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했다. 그 편지들은 에스더가 용기를 내어 라요스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편지였다. 하지만 라요스를 사랑한 에스더 언니가 가로채는 바람에 에스더는 그 편지를 보지 못한채 20년을 보냈다.
라요스는 에스더에게 전 재산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사랑을 시작했던 두 사람, 그들은 사랑했고, 그것은 둘이 이미 끊을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아니었던 시간 내내 보이지 않는 한 쪽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이 용기가 없었던 에스더에게 있다는 것이다.
에스더는 라요스가 사깃꾼인 것을 알지만 전 재산을 양도하기로 결심한 순간 기분이 좋다고까지 한다. 그리고 그가 내민 재산양도서류에 서명을 한다. 그것도 만류하는 에스더의 후견인 격으로 지난 20년 에스더가 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하고 만들어준 앙드레 앞에서...
"앙드레, 당신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현실적인 남자에요. 당신은 법률이나 관습, 오성이 규정하는 대로 오로지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여자들은 늘 현명하고 논리적일 수 만은 없어요.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이십 년전에 내가 정말로 현명하고 솔직했더라면, 그 날밤 언니의 약혼자인 라요스, 어음 사깃꾼,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 노골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누누의 말을 빌리면 인간쓰레기인 라요스와 함께 이 집에서 도망쳤을 거예요. 용감하고 현명하고 솔직했더라면...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수없어요. 특별히 좋거나 신나는 일은 없었겠죠. 하지만 적어도 세상의 오성의 법칙보다 강한 명령에는 따랐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요? 나는 이해했어요."
"라요스의 말이 맞아요. 앙드레, 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으며, 한번 시작한 것은 끝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가능하다면 말이죠. 이제 우리는 끝을 맺었어요."
그리고 에스더는 서류에 싸인을 했다. 그날 밤 라요스 일행은 서류에 등록되지 않았을 잼과 정원에 핀 꽃을 꺾어 떠났다.
내가 읽은 [유언]은 이렇다.
아주 식상한 내용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깃꾼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언니와 결혼을 했다. 상처받은 주인공은 20년간 홀로 산다. 그러다 남자가 나타나 전 재산을 요구한다. 사랑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 재산을 준다.
그런데 이 안에 사랑에 대한 깊은 사색이 들어있다.
라요스는 사랑이다.
이 책을 누군가가 읽는다면, 한 판을 읽고 나서., 라요스와 사랑을 대치시키고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나는 그렇게 다시 읽어 볼 작정이다.
사랑은 라요스처럼 온갖 종류의 사기라는 사기는 다 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언제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지 않는 날들은 평화롭다. 아무 일이 없다.
밥을 먹고, 꽃을 보고, 책을 읽어서 똑똑해지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두 꿰고 있다한들
그것이 사기를 당하는 사랑의 시간과...어찌 비교가 될까...
주인공 에스더 또한 20년간 피아노를 가르치고, 정원을 가꾸고, 주위에 도와주고 돌봐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지냈다.
그런데, 그것은 사는 시간과 죽은 시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행복하지 않다고 죽은 시간과 같다는 것이 억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랑을 통해서 느끼는 희노애락.. 그것에 비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바스락 거리는 종이장 같은 것이다.
에스더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이라도 사랑했다면, 그 시간은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존재로서 끝내지 못하고...
43살인 에스더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랑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동양적으로 말하면 업보라고 해야하나.. 다 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것.
에스더는 모두 던져주고나서 진정 평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사랑이라는 실체를 이해하고...
사랑이라는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 유서를 썼다.
갑자기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다 갚은 걸까? 갚았다면 무엇으로 나는 빚을 갚았으며, 갚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어느 시간 사랑했을 사람과 묶여서 존재하는 것일까? 산도르 마라이식으로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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