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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경주] 무릎의 문양

by 발비(發飛) 2009. 4. 6.

무릎의 문양

 

김경주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헀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가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ㄷ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호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를 날아 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를"

 

3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 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어느날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었다.

스타킹이 뚫어진 사이로 피가 났다.

며칠 후, 피가 난 무릎에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며칠 수 딱지가 사라진 자리에 흉터가 남았다.

 

또 흉터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금방 떨어진 딱지때문에 엷은 분홍색을 띤 흉터 옆으로 크고 작은, 올록 볼록한 상처들이 무릎에 나란한 것을 보았다.

한참 무릎을 들여다 본다.

무릎에는 유난히 흉터가 많다.

흉터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때는 그랬다.

낯선 곳에서도 뛰었고, 높은 곳에서도 뛰었고, 집안에서는 웬만하면 무릎 걸음을 걸었다.

바지에서 가장 먼저 닳는 곳이 무릎이었다.

바지를 사면 무릎에 덧천을 대지 않은 채로 한 계절을 입고, 덧천을 대고 한 계절을 입고 나면 바지가 작아졌다.

무릎이 깨지는 것도

바지에 덧천이 대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서 뛰어내리는 것도, 무릎걸음을 걷는 것도, 누구에겐가 무릎을 꿇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에 몰두하였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무릎에 난 흉터들이 일제히 생명을 얻는 듯 했다.

마치 금방 깨어져서 피가 나는 것처럼..

어디론가로 빠르게 달려가다가,

저 아래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뛰어내리다가,

일어설 시간도 없어서 무릎걸음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기다가,

생긴 상처처럼 ...

피가 나도록 아파도 행복했다.

 

무릎이 있는 이유를 알겠다.

내 몸 중에 오직 한 군데,

몸을 접을 수 있는 곳.

몸을 접어 어디론가 굴러갈 수 있는 곳.

 

 

나의 무릎이야기가 김경주 시인의 무릎 문양과 다르지 않음을...

말이 아니라 의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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