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알 수 없는 사이
공간: 언어의 공동
등장인물: 미지의 혀
이 극에서 '암전은 극 전반을 감싸는 소재와 상징으로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면 좋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
음악 역시 특별히 따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지면이라는) 무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 가지 염두에 둘 사항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 안에 박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틈날 때마다 상기하는 것이다. 박동은 박동으로 인식되고 소리는 소리로 구별된다. 그것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을 획득한다. 개가 짖는다. 그 개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개가 아니라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심장에서 자신의 형신으로 퍼지는 파동이 피와 살을 떠가면 뜻 모를 파장에 각운과 각주를 다는 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음악에 대한 신뢰는 호흡은 머지 않아 하나의 形이 된다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빚어지기 전의 상태에서 지금의 여기까지 연결된 몸의 박동은 음악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무대의 이명(耳鳴)은 배속으 태동을 간직하고 있는 그 언어에 호흡기를 다시 대주는 일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형신이며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상에 흘러나와 음악이라고 부르는 타인의 정의들은 어쩌면 가장 낯설고 모호한 영역인지도 모른다는 예술가의 말은 존중되어야 한다. 음악은 보다 내연의, 자신만의 특벽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사토브리앙은 음악을 만지고 본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음악의 속성은 아니라는 것만은 명기해둔다. 음악은 시차를 갖는 순간 다른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시(시어)는 허공이 질료가 된 리듬이거나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생태계이므로 客은 작가의 의지를 자신의 언어로 상상할 것이고 상상력은 그 의지를 배반할 수 있다.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이 극은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들이 지면에서 빚어내는 무대이면서 언어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언어들을 섬세하면서도 모호하지 않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심중에 보인다면 우리들 생의 배우이며 비후인 언어를 상대하는 것이다.
이 극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
사이
<극이 시작되기 전 잠시 1~3막까지 각 막을 한 번 드르륵 넘겨주길 바라며>
막이 오르면
언어들이 미로와 멀미 속에서 활공하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음과 모음의 항해들
긴 사이
지면 속에서 빠져나오는 언어
천천히 지면을 걸어 다닌다.
언어가 허공에 입을 천천히 벌리며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격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 너희들이 나를 들고 있을 때 나는 너희가 유령처럼 느껴지고 너희가 나를 유령이라 발음할 때 너희는 나라는 유령이 들고 있는 인형일테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머무는 세계의 유령을 들고 있는 인형의 웃음이지'
반대편에서 허공들 하나씩 등장한다.
언어 속으로 하나씩 천천히 스미기 시작한다.
사이
반대편에서 다른 언어 등장한다
여긴 어디지?
언어의 속인 것 같아.
어떤 곳이지?
그렇지 우리가 연연하는 곳일세.
춤추는 언어들
아련하고 요밀한
긴 사이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시
위의 글은 김경주시인의 제 2시집 [기담] 제 1막의 시작 부분이다.
이것이 시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내게는 그 의미의 전달이 시적인 것은 분명하다.
시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잔상이 남는 것
그 잔상이 어떤 무게를 가지는 것
그 무게가 내 의식 속으로 파고 드는 것
그 의식이 내게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
김경주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을 조명이 없는 캄캄한 무대라고 설정을 한다.
그리고 무대 위를 움직이는 것은 언어이다.
언어의 움직임 아니 소리 자체가 행위가 된다.
관객은 눈을 감아도 눈을 감지 않아도 그의 언어가 몸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낯설다.
이 낯선 연극에 내가 몰입이 될지...
(하지만 난 이 시집을 처음 받자 앞의 몇 편을 후루룩 읽었고, 고백하건데 몰입할 수 없었다.)
시인은 왜 이런 방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까?
시의 음악성?
내가 받아들이기에 김경주 시인은 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의 시에서 음악성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의 언어를 음악으로 감상하라고 한다.
그런데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클래식이라는 낯선 장르의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어떤 악기인지도 모를 악기의 소리들이 한 곡을 지배할 때가 있다.
악기의 이름, 소리... 아무것도 모르면서 악기와는 상관없이 어느 세계에 도달되는 느낌처럼
무대위를 떠다니는 단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어느 공간에 도달되는 듯한 느낌.
매번 어디인지 모르는 낯선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도 마찬가지.
되돌아 오고나서 어디를 갔다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새로운 공기를 마신 느낌.
그럼 그의 언어에 음악성이 있는 것이 된다.
여기까지 인정하며...
난 그의 무대에 빠지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한다.
언어의 무대.
언어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이 다르지 않다.
우리의 세상과 인형의 세상과 또 언어의 세상이 다른지 않다.
언어...
세상은 시간이라는 큰 구조 안에서 언어라는 기류로 돌아가고 있다.
언어의 움직임에 따라 한 세상에서는 세상이 규정되고 설명되고,
또 한 세상에서는 세상이 기쁘고 슬프다.
언어보다 더 넓게 크게 세상을 떠도는 것은 없다.
언어를 무대 위로.. 그 많은 언어들이 무대 위로... 지금 올라오고 있다.
김경주 시인의 언어로...
사이
반대편에서 다른 언어 등장한다
여긴 어디지?
언어의 속인 것 같아.
어떤 곳이지?
그렇지 우리가 연연하는 곳일세.
춤추는 언어들
아련하고 요밀한
긴 사이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시
김경주 시인의 언어로...
사이 사이에 끼인 언어를 무대로 끌어 모았다.
앞으로 며칠간... 김경주가 올린 언어들의 연극을 관람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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