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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경주]시집 기담.. 공간의식, 언어의식, 존재의식 그리고 타자 의식

by 발비(發飛) 2009. 4. 7.

------------시집 한 권을 집중해서 읽었다. 껄끄러움의 근원을 찾아서

 

 

김경주 제 2 시집 『기담』

 

공간의식, 언어의식, 존재의식 그리고 타자 의식

 

 

 

 

 

시를 쓰건 쓰지 않건 시를 생각하는 행위에는, 언어를 열고 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멀미와 미로 때문에라도 언어 속의 가로등과 진피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기담』을 읽는 동안 멀미를 했다. 김경주 시인 또한 시 이 말한 그 멀미를 같이 한 듯하다. 멀미는 가속도의 병이다. 시집의 주인인 시인조차 가속을 이기지 못해 멀미를 느끼는데 하물며 시를 읽고 있는 독자야 말할 것도 없다. 혼수상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가속도에 의해 몸이 모든 저항을 잃어버려 저절로 무장해제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시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창밖에 무엇이 가끔 눈에 띄기 시작했다.

 

1. 연극 - ‘있다’ 의 의식

 

때: 알 수 없는 사이

공간: 언어의 공동

등장인물: 미지의

 

이 극에서 '암전은 극 전반을 감싸는 소재와 상징으로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면 좋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

 

김경주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을 조명이 없는 캄캄한 어느 사이를 무대라고 설정을 한다. 그리고 무대는 언어만이 사용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언어를 생산하는 혀가 인물이 된다. 무대를 움직이는 에너지 운동의 근원은 언어가 된다. 언어의 움직임, 소리 자체가 행위가 된다. 관객은 눈을 감아도 눈을 감지 않아도 그의 언어가 몸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이러한 무대 자체가 낯설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런 방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까?

시집이 시작 되기 전? 무대장치에 대한 자세한 지문-이 친절한 설명-을 읽으려 하는 순간부터 시를 읽으려 했던 독자는 그의 시들과 소통이 불가능할 듯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느낌뿐일 수 있다. 왜냐면 시인이 선택한 연극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관객이라는 대상이 필수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소통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일설들과는 다르게 분명 독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펼칠 무대와 배우에 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이 시에 포함되는 부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의미의 전달은 시인 것이 분명하다. 낯선 이미지의 포착 및 전달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시적이라고 말할 때 어떤 문장이 단순히 아름다운 경우보다는 그 잔상이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 그 무게가 내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것, 그 의식이 내게 무엇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접하는 나는 무언가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이전의 누군가가 경험한 감정과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그리고 그것을 접한 사람의 정서를 다방면으로 건드려줄 수 있는 무엇이 있다.

 

음악 역시 특별히 따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지면이라는) 무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 가지 염두에 둘 사항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 안에 박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틈날 때마다 상기하는 것이다. 박동은 박동으로 인식되고 소리는 소리로 구별된다. 그것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을 획득한다. 개가 짖는다. 그 개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개가 아니라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심장에서 자신의 형신으로 퍼지는 파동이 피와 살을 떠가면 뜻 모를 파장에 각운과 각주를 다는 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음악에 대한 신뢰는 호흡은 머지않아 하나의 形이 된다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빚어지기 전의 상태에서 지금의 여기까지 연결된 몸의 박동은 음악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무대의 이명(耳鳴)은 배속의 태동을 간직하고 있는 그 언어에 호흡기를 다시 대주는 일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형신이며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상에 흘러나와 음악이라고 부르는 타인의 정의들은 어쩌면 가장 낯설고 모호한 영역인지도 모른다는 예술가의 말은 존중되어야 한다. 음악은 보다 내연의, 자신만의 특별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사토브리앙은 음악을 만지고 본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음악의 속성은 아니라는 것만은 명기해둔다. 음악은 시차를 갖는 순간 다른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시의 음악성? 운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의 시에서 음악성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의 언어를 음악으로 감상하라고 한다. 그런데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클래식이라는 낯선 장르의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바로크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어떤 악기인지도 모를 악기의 소리들이 한 곡을 지배할 때가 있다. 악기의 이름, 소리... 아무것도 모르면서 악기와는 상관없이 어느 세계에 도달되는 느낌처럼 무대 위를 떠다니는 단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어느 공간에 도달되는 듯한 느낌이다. 매번 어디인지 모르는 낯선 공간으로 인도되었다가 되돌아오고 나서 어디를 갔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새로운 공기를 마신 느낌이다. 음악이란 것이 그렇다.

 

p39

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

 

김경주 시인이 스스로의 시를 음악극이라고 정의하며 그 연주자이자 배우를 언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음악적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뜻이 된다. 사실 그의 시에서 음악성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가 시를 펼쳐놓기도 전에 언급한대로 음악극의 무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으므로 여기까지 인정하며 그의 무대에 빠지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한다.

언어의 무대, 언어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이 다르지 않다. 세상은 시간이라는 큰 구조 안에서 언어라는 기류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언어의 움직임에 따라 한 세상에서는 세상이 규정되고 설명되고, 또 한 세상에서는 세상이 기쁘고 슬프다. 언어보다 더 넓게 크게 세상을 떠도는 것은 없다. 그래서 김경주 시인은 시에서 좁아져가는 언어, 언어 그 자체. 그 많은 언어들이 무대 위로 지금 올라오고 있다. 시의 언어들이 좁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굳고 있다는 것을 아마 시인은 인식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세상 사이사이에 끼인 언어들을 생각나는 대로 일단 무대로 끌어 모은다. 물론 시작의 기본인 기억과 상상이라는 대전제하에 이합집산된 언어들이다. 그의 시가 난해하다면 기억과 상상의 부분이 아니라 이합집산된 언어, 새로운 구조로 앉힌언어의 집 때문이 아닐까.

 

여기 등장하는 시(시어)는 허공이 질료가 된 리듬이거나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생태계이므로 客은 작가의 의지를 자신의 언어로 상상할 것이고 상상력은 그 의지를 배반할 수 있다.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이 극은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들이 지면에서 빚어내는 무대이면서 언어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언어들을 섬세하면서도 모호하지 않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심중에 보인다면 우리들 생의 배우이며 비후인 언어를 상대하는 것이다.

 

이 극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p13 기담 전편

기담은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들의 실존은 그대로 기담이다. 기담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를 거슬러 올라간다. 실존을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의지하고 있던 헛존재들을 제거해야한다. 본질만이 남을 수 있도록 시인은 지도를 태운다. 그리고 내 안에서 운동하고 있었던 처음 운동근원이었던 지진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처음 나의 지진이다. 시인은 그 처음의 근원을 찾고 싶은 것이다.

다시 꾸게 되는 태몽, 지진이 보낸 싸인인 태몽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 싸인을 받아 그대로 말하는 복화술, 곧 시인이 풀어내는 말들, 이 읊조림은 시인의 실존이었을 지진이라는 원형일지 아니면 무덤일지. 시인 자신을 인형이라고 한다. 의식은 없는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이라 한다. 인형은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한다고 했다. 시인 자신이다.

 

이상한 줄의 끝에는 무엇이 달려있는가...

 

지상으로 흘러와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태몽을 거슬러 올라가 태몽의 싸인을 이해하고

그 싸인의 근거에 몰두하여 지진이라는 에너지의 근원을 찾아 떠가는 우리는 인간, 인간에게는 자신의 태내로 기어들어가서야 다시 흐릴 수 있는 피가 있다.

 

인간의식, 인식

존재의식, 인식

 

의식을 태내에 두고 태어난 인간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기담이다.

 

 

2. 사이- ‘이다’ 의 의식

 

언어와 언어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언어들을 빼고 나면 자리가 남는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군을 보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와 지배하고 있는 사고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김경주 시인은 시집 전체에 스스로도 언급했다시피 ‘언어- 연필’ ‘사이- 간間, 틈’ 등의 말이 곳곳에 깔려있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사이

 

<극이 시작되기 전 잠시 1~3막까지 각 막을 한 번 드르륵 넘겨주길 바라며>

 

막이 오르면

언어들이 미로와 멀미 속에서 활공하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음과 모음의 항해들

 

긴 사이

 

지면 속에서 빠져나오는 언어

천천히 지면을 걸어 다닌다.

언어가 허공에 입을 천천히 벌리며

 

식물은 자기 안의 짐승을 토하다 가는거고

인간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이 아니야

자기 안의 식물을 모두 토하고

가는 거지

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p14

 

김경주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시는 잠언보다는 선언이다’고 말했다. 잠언과 선언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바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누구를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과 가려 하는 곳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은 부정의 힘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다고 양심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식물과 동물의 부조리처럼 사적, 비밀을 가져야 할 것이 많다고 한다. 이제 그는 수정하려한다고 선언했다. 솔직하겠다고 선언한다. 언어가 열어놓은 길로 시인은 앞으로 가려한다고 말한다. 긍정이다.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 너희들이 나를 들고 있을 때 나는 너희가 유령처럼 느껴지고 너희가 나를 유령이라 발음할 때 너희는 나라는 유령이 들고 있는 인형 일테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머무는 세계의 유령을 들고 있는 인형의 웃음이지'

 

 

 

반대편에서 허공들 하나씩 등장한다.

언어 속으로 하나씩 천천히 스미기 시작한다.

 

사이

 

반대편에서 다른 언어 등장한다

 

여긴 어디지?

언어의 속인 것 같아.

어떤 곳이지?

그렇지 우리가 연연하는 곳일세.

 

춤추는 언어들

아련하고 요밀한

 

긴 사이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시

 

 

3. 연필- ‘쓴다’ 의 의식

 

연필 속에서 탄광이 쏟아져 나온다 탄광을 말려서 간을 빚는 자, 시를 쓴다

(......)

연필은 대가리를 디밀며 해저를 뒤집고 다닌다

(......)

더 천해져야 한다 이것저것 간을 보면서

-연필의 간 중에서 32p

 

 

김경주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의 하나가 연필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쓰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 독자에게는 연극무대라고 설정해두고, 자신도 연극무대에 올라선 배우처럼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이라는 도구를 마치 내시경렌즈처럼 사방에다 갖다대고, 연필이 보여주는 그대로를 무대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연필이 보여준 언어극 안에서 어쩌면 그도 함께 관람석에 앉아 구경할런지 모른다. 그 자신은 ‘시’의 모습을 하지 않은 ‘시’를 쓰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새기며 새로운 ‘시’로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시가 흐려지고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그 조차도 연필과 자신을 분리해서 시가 어디 있는지를 시에게 묻고 있다. 시를 통해 무엇을 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등단시를 보면,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 김경주 등단작 ‘꽃 피는 공중전화’ 전문

 

 

몇 해 전 일련의 젊은 시인들을 선두로 한 미래파의 시들이 한동안 회자가 된 적이 있다. 김경주 시인도 그 무리 중의 하나라고 그 때는 생각했었고, 그렇게 분류가 되기도 하였다. 미래파가 회자된 것은 7-80년대를 건너온 소위 실천문학의 시대가 가고 갈 곳 없는 시들은 서정시의 시대로 제자리걸음을 할 때, 흔들림이었다. 뻔한 시가 아니라 모색하는 시를 쓰자고 하는 것이 미래파의 화두였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개인작업의 결과일 뿐 미래파로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래파는 시적 자아가 끌고 가며 보여주는 이미지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지 채집에만 성공하였을 뿐, 현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미래파의 두 번째 시집들이 그 예이다. 과도한 이미지의 사용으로 현실과 시적자아가 힘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미래파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시공의 개념을 초월한 이미지 사용에 대한 뒤틀림이며 낯섦이었었다면, 김경주 시인은 두 번째 시집 [기담]은 ‘시’가 무엇인지 돌아본 흔적이 있다. 그곳이 정확하게 지금 가야 할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가 무엇이며,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어’ 와 ‘공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근본적으로 시를 쓰는 자의 소임이 있다고 본다. 시가 감염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서정이 지닌 폭력성이 있어요.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서정이 옹호를 받는다. 난해한 것을 꺼리고 온기를 찾는다. 그것이 반성 없이 기조로 형성되면 곤란하다. 시는 모든 언어예술의 최전방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 또한 모국어가 썩지 않게끔 고유성을 찾아내야 한다. 시는 제도화, 평면화 되면 그 순간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문화를 평가할 때 시인이 얼마나 있느냐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시네 21과의 인터뷰 중에서

 

시에는 틀이 없다. 시는 소설에서는 근본적으로 가질 수 없는 언어의 폭력성을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산문의 시대에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시의 무기이며, 존재가치일 수 있다. 소설이 문장으로 만들어낸 스토리를 가지고 의사전달을 해야 하는 문학 장르라면 시의 경우는 길이, 문법, 의사전달의 범위조차도 자유롭다. 그래서 전방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의 생성, 언어의 의미 확장 등을 시를 통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더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들, 더는 흐르지 않는 물에 돌을 던지는 것, 언어의 물이 흔들리면서 자리바꿈을 한다. 그것이 시작인 것이다.

 

1800년대 말 마네를 선두로 한 인상파 그룹이 아름답게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만이 그림이라고 인정하던 시대에 그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화가마다의 시점으로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그림으로서 현대미술의 단초가 되었던 것처럼 한 장르가 끝날 즈음 느껴지는 지루한 기운을 감지한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몫을 위해서 원론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서 전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김경주 시인은 그것을 공간적 개념에서의 과도기 ‘사이’ 라는 것과 운동적 의미에서 ‘언어’에 초점을 맞추었다. 지금은 그가 멈춰서서 자신의 위치를 의식을 한 것으로서 큰 걸음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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