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라즐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 1895~1946)
이 말을 한 때는 1920년대 후반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며, 멀티아티스트... 현대로 치면 앤디워홀? 정도?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관계로 지명도야 앤디워홀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예술성은 더 높았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는 캘리그래피가 예술의 일부가 되도록 선도하였으며
사진을 비롯한 모든 예술적인 도구들을 사용하여, 그 목적이 이미지로 전달되는 것에 촛점을 맞춘 활동을 하였던 듯 싶다.
그가 말한 미래.
우리는 그가 말한 미래에 살고 있다. 2009년!
그가 예견한대로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DSLR 같은 절대 보급형이지 않은 카메라는 보급형이 되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광고 또한 예전에는 상품을 설명하였지만, 이제는 이미지만 보여준다.
구구한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은
이미지로 오지 않으면 소통을 포기한다.
세상은 누구나에게 개방되어있다.
공평하다.
그래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래 전에는 그림작가, 글작가가 보여준 세상이 있었다.
그림작가, 글작가가 보여준 세상은 걸려준 세상이었으며, 그들이 걸러준 세상을 천천히 잘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을 문화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말한다.
그들이 보여준 세상은 그들만의 특별한 세상일 뿐 내가 본 세상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을 같이 보았을 때야만 상대에 대해서 동의한다.
특별한 눈으로 특별한 감으로 본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본 이미지.
객관적으로 본 이미지.
구구한 필터가 끼워진 것이 아닌 투명한 그대로의 이미지.
이제 투명한 이미지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문맹자이다.
더 들어가면 이미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표현할 줄 모르는 문맹자이다.
너무나 다양한 세상이며, 다양함 속에서 다양함만큼이나 참 많은 종류의 생각들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들의 담 또한 높다.
각자의 말로는 소통하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서 답은 이미지인 것이다.
그림도 글도 세상 모든 예술 쟝르가 한 가지 이미지로 보여줄 때만이 소통이 가능하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단 1초.
그 시간동안 이미지는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이상이면, 뭐라는 거야! 하고 버럭하며 자리를 뜰 것이다.
참 오래전 사람이 예견한 세상이다.
필터를 깔지 않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생산하여야만 소통할 수 있다.
라즐로 모홀리-나기
이미지... 찰라의 단면
난 이미지로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관념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하기.
Laszlo Moholy-nagy : 라즐로 모홀리-나기(1895~1946)
헝가리 태생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시각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전방위 예술가이며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수를 지냈다. 과학기술 매체를 이용하여 예술의 지평을 넓혔고 인간의 삶과 예술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총체적 예술’을 지향하였다.
1895년 헝가리 바츄보르슈드(Bácsborsod)에서 태어났다. 1914년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포병 장교로 참전했다. 복무 중 부상으로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시작(詩作)과 드로잉에 몰두하였다. 제대 후 헝가리 문학지 등에 시를 기고하거나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면서 법학도의 꿈을 접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8년 10월 혁명으로 헝가리에 소비에트 의회가 들어서자 공산당에 입당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지주 집안의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당이 거절되었다. 이에 비엔나로 이주하였으며 이때부터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망명의 역사는 시작된다.
1919년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가보(Naum Gabe), 리시츠키(El Lissitzky) 등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를 접하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20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포토그램(Photograms)과 포토몽타주(Photomontage) 등 사진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탐구하였다. 포토그램은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위에 직접 물건을 오려놓고 감광시켜 오브제의 윤곽뿐만 아니라 질감까지도 기록하는 방법이며 포토몽타주는 한 장의 화면에 여러 장의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것을 말한다.
1921년 베를린에서 열린 구성주의 전에서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를 만나 바우하우스 교수단에 초빙되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마르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법과 재료를 합리적이고 실용성 있게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젤 그림이나 조각품 대신 새로운 테크닉과 매체로 눈을 돌려 시각과 마음을 개방하도록 독려하였다.
1928년 바우하우스 교수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피스카토르(Piscator) 등의 무대디자인을 담당하였다. 그는 컬러사진과 영화, 혁신적인 그래픽 디자인, 레이아웃, 포스터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를 실험하였다.
1937년 미국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를 열어 미국의 디자인과 사진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뉴 바우하우스는 재정난으로 1938년 폐쇄되었지만 1944년 디자인 연구소(Institute of Design)로 개명하여 명맥을 이었으며 1946년 일리노이 공과대학(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 합병되었다. 모호이너지는 1946년 시카고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작품에는 <무제(포토그램) Untitled(Photogram)> (1922), <구성, 작품 4 Construction, Work 4> (1923), <질투 Jealousy> (1927), <시카고 Chicago> (1938) 등이 있으며 저서로 <회화, 사진, 영화 Painting, Photography, Film> (1925), <새로운 시각 : 재료에서 건축까지 The New Vision : from Material to Architecture> (1929), <움직임에서의 시각 Vision in Motion> (1947) 과 그밖에 바우하우스 총서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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