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삥 둘러싸기만 해도
이 성 복
무엇 때문에 캄캄한 밤이
내 입 가운데에서 부풀어오르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파블로 네루다, 어디냐고 묻는다면
생각 같아서는 수백 마리 영양들이 뿔뿔이 달아나지 않고 그저 삥 둘러싸기만 해도, 대여섯 마리 들개에게 물어뜯기는 어린 영양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생명의 신비라 할까, 사람 사는 세상에도 어김없이 통하는 야비와 비겁의 신비라 할까, 그날, 돼지 막창에 소주 한 잔으로 불콰한 오후, 싸인 좀 해달라고 내민 '효순이를 살려내라!는 서명지에, 비틀거리는 이름과 전화번호 적어 넣으며 나는 또 어린 영양의 창자를 끈질기게 물어뜯는 불콰한 턱주가리를 보았던가
칠레에 도착하던 날 밤.
저녁을 먹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가 담벼락에 '그라샤스 칠레'라는 글씨들이 줄지어 써있었다.
여행의 일정 중 가장 마지막 순서였던 나라였으며,
원래는 2박3일의 일정이었으나 볼리비아 비자문제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칠레에서 주어진 시간은 1박2일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름대로 네루다의 시 몇 편을 묶어서 나만의 네루다 시집을 만들어서
여행 중 하루에 한 번은 네루다의 시를 읽었다.
한국에서 이미 출간된 그의 시집을 읽을 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네루다일 뿐...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공감할 수 없음에 답답했었다.
무엇일까?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았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그것이 모두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여행을 함께 하던 사람들은 도대체 네루다가 누구냐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며 내가 엮은 그의 시집을 내밀었다.
누구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누구는 눈물이 난다며 감탄했다.
난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칠레에 가면 난 네루다 투어를 할 거야! "
하루밖에 없는 일정에 산티아고에서 네루다의 집이 있는 이슬라네그라까지는 2시간 거리, 그리고 또 하나의 네루다의 집이 있는 발파라이소까지는 또 2시간 .... 그 길을 하루 안에 다 돌아올 수 있을까 싶었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네루다의 기념티셔츠를 꼭 입고 싶어."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네루다의 별장이다.
이 곳은 네루다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끝도 없는 태평양이 ... 그리고 거기서 이는 파도가 거친 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집은 두 채로 이어져 있었으며
바다를 사랑했다는 그는 집을 온통 배의 모양으로 장식하고 그의 수집품 중의 대부분은 배와 배의 부속물들이었다.
첫인상?
그는 참 잘 사는 사람이었구나.
뭐가 그리 많던지.
그는 소문대로 수집광이었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모을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인데 ... 넉넉했었구나 싶더라.
그리고 두번째 인상.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보들레르의 사진과 벽에 걸린 뒤마의 사진 등 그가 사랑한 예술가들의 사진들이 한 방에 걸려있었다.
자신이 예술가이면서 예술가를 사랑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
그의 시와는 사뭇 다른 보들레르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그 집 이슬라 네그라.
그의 집에서는 어떤 사진 촬영도 되지 않았다. 그저 보고 듣고만 해야한다.
영어로 가이드를 해 주는 아주머니(?)와 함께 들었던 프랑스 관광객들의 진지한 대화를 이해하고 싶다는 안달감으로 가득했던 그 곳을 나오면서도 나는 네루다...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는 사람이긴 하구나 하는 생각뿐....
그리고 그 마을 전체는 네루다로 먹고 사는 듯 했다.
네루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네루다의 집이 있다는 발파라이소로 향했다.
발파라이소는 아주 오래된 작은 항구도시이며, 바다를 향해 빙둘러쳐진 언덕에 집을 다닥다닥 붙은 곳이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뭔가를 타고 갔어야 하는데... 그저 걷고 싶다는 생각에 지도 한 장을 들고 뜨거운 남미의 태양아래를 걸었다.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 느낌... 간직하고 싶다.
얇은 함석 합판에 갖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가고 또 가도 없는 그의 집.
몇 사람에게
"돈 데 엘 드 네루다 하우스?" 를 외치며 동네를 몇 바퀴 돌아 들어간 네루다의 집은 외장 공사중이었다.
한 층의 평 수가 다섯 평 정도는 될까?
5층짜리 건물이었다.
작은 집에 커다란 창문들... 그리고 배의 창을 닮은 작은 창들은 다닥 다닥 붙어있는 발파라이소의 작은 집들을 마주 하고 있었다.
이즈음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렸다.
작은 집들과 태평양을 향해 있는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을 네루다의 커다란 덩치가 셋팅이 된다.
이슬라 네그라 그의 집에 있었던 수많은 수집품들이 생각났다.
저 집들과 닮아있다.
내 눈에 수집품들과 함석지붕의 집들이 나란히 보인다.
그리고 하나 더...
마추픽추를 휘돌고 있는 붉은 강.
그리고 그저 읽기엔 꽤 긴 그의 시
마추픽추의 山頂 - 노상에서의 편지
안녕. 하지만 너는
나와 함께 살꺼야, 내 속에
내 혈관에 돌아 흐르는 핏방울 속에 숨어
아니면, 밖으로 내 얼굴을 불태우는 입맞춤
내 허리를 휘감는 불의 띠가 디어
너는 나와 함께 갈꺼야.
사랑하는 사람아, 부디 내 생명의
밑바닥에서 나온 이 큼지막한 사랑을 받아,
네 속에서 영토를 찾지 못하고
빵과 꿀의 섬들 속에
길 잃은 개척자의 사랑.
내가 너를 발견한 건 그 뒤의 일이었어,
폭풍우 뒤,
빗줄기가 대기를 씻더니
물 속에
너의 예쁜 발이 물고기처럼 빛나지 않겠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나의 전쟁터로 떠난다.
땅을 후벼 파 너에게 굴을 하나 만들어 줄께
그리고 거기서 너의 '선장'은
침상에 꽃을 놓고 기다릴께.
더 이상 생각 마, 내 사랑아.
우리 사이 지나간
폭풍,
성냥불처럼
어쩌면 잠깐 데인 자국을 남기고 떠나간 일.
평화는 왔지. 이제 내 다시
나의 조국으로 싸우러 돌아가니까.
네가 내게 준 피 몇 방울로
내 심장은 뿌듯하다
영원히
그리고
너의 벌거숭이 존재로 가득한
나는 나의 손을 데리고 가,
자, 보라구,
날 보라구,
내가 바다로 가면 광휘에 휩싸이지?
내가 밤으로 가면 배를 타고 가는 것 같지?
보라구, 바다와 밤은 너의 눈동자야.
너를 떠나지만 너를 헤어나지는 못해.
자, 내 이야기를 들어봐 :
내 조국은 당신 꺼가 될 꺼야,
내가 정복할 테니까,
너에게 줄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줄 꺼야
모든 내 사람들에게.
언젠가 그 도둑놈도 성곽에서 나오겠지.
그리고 침략자도 추방될 꺼야.
생명의 모든 열매들이
전에는 화약냄새에만 젖어 있던 열매들이
이젠 내 손에서 자랄 꺼야.
난 이제 새 꽃잎들을 어루만져 줄 줄도 알아
네가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예쁜 사람아, 내 사랑아,
너도 나와 함께 싸우러 가는 거야, 몸과 몸으로
내 심장 속에 너의 입맞춤이
붉은 깃발처럼 살아 있거든.
내 쓰러지는 날
흙만이 나를 감싸주는 게 아닐 꺼야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이 큼지막한 사랑
내 피 속을 맴돌며 살아온 사랑이
나를 껴안아 줄 꺼야.
너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그때가 되면 기다려
그때만 아니라 어느 때나
어느 때나 너를 기다리고 있을께.
그리고 내 그토록 싫어하는 슬픔이
행여 너의 방문을 노크하거든
말해,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행여 고독이 너더러 바꾸라고
내 이름이 씌어진 그 반지를 바꾸라고 하거든
고독더러 말해, 이야기는 나하고 하라고,
그리고 나는 떠났어야 했다고
나는 군인이라고. 그리고 내 있는 곳
빗줄기 아래건
불길 아래건
사랑하는 사람아, 내 기다리고 있어
가장 무서운 사막이라 할지라도
꽃핀 레몬
꽃핀 레몬나무 옆에는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
이 세상 모든 곳, 삶이 있는 곳
봄이 피어나고 있는 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행여 누가 "그 사람
널 사랑하지 않아" 하거든, 생각해
그 밤 내 발은 외로울 꺼라고, 내 그토록
사랑하는 곱고 작은 네 발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아, 행여 누가
내 너를 잊었다고 하면, 심지어
내가 네게 그런 소리를 해도
내 그런 소리할 때
날 믿지마,
누가 어떻게
내 가슴 속에서 너를
잘라낼 수가 있겠어,
너를 향해 피흘리며 가는
내 피를 또
누가 맞으라는 거야.
하지만 그러나 또한
난 내 사람들을 잊을 순 없어.
돌부리마다
거리마다 싸우러 갈 꺼야.
너의 사랑이 날 돕고 있어 :
그건 꼭 머금은 꽃송이 같아서
갈수록 향기가 내 가슴을 채워.
그러다 갑자기 꽃이 피면
그건 내 속에 피는 큼지막한 별.
사랑하는 사람아, 밤이야.
검은 물이, 잠든
세상이 날 에워싸는데,
곧 여명이 오겠지,
우선 그동안 내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너를 사랑해", 이 소리를 하려고.
"너를 사랑해", 이 소리는
내 가장 가까운 사람아
가꾸고, 닦고, 일으키고
지키라는 거,
우리의 사랑을.
씨를 뿌린 한 줌 흙을 남기듯
난 네게 사랑을 맡기고 떠난다.
우리의 사랑에선 생명이 싹틀 꺼야.
우리의 사랑을 마시고 생명은 자랄 꺼야.
언젠가 때가 오면
우리와 똑같은
한 남자,
그리고 한 여자가
우리의 이 사랑을 만지겠지. 그때도 우리 사랑은
힘이 있을 꺼야, 만지는 손을
불태울 만큼.
우리가 누구였던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불길을 만지겠지
그리고 그 불길은, 아름다운 사람아, 소박한 너의
이름을 말해 줄 꺼야
그리고 내 이름도, 너만 혼자 아는
너만 혼자 알았던, 지상에서
내가 누군지 너 혼자만 아는
그 이름, 아무도 나를 그토록 안 사람이 없었기에
너의 손 하나처럼
아무도
어떻게, 언제
내 가슴이 불타고 있었는지
만져 본 사람이 없었기에.
오직
너의 가무잡잡한 큰 눈이
너의 넓은 입,
너의 살결, 너의 가슴
너의 배, 너의 뱃속이
나를 알기에,
내가 잠깨운 너의 영혼이
인생의 마지막까지 노래하며
남아 있으라고
잠깨운 너의 영혼이
나의 불길을 알기에.
사랑이여, 내 너를 기다리고 있노라.
사랑이여, 안녕, 내 너를 기다려.
사랑이여, 사랑이여, 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 편지는 끝난다
한 자락 슬픔도 없이 :
내 발은 꿋꿋이 땅을 밟고 섰고,
내 손은 길에서 이 편지를 쓴다.
나의 삶 속에서 난
항상
동지와 있거나, 적과 맞서고 있거나
내 입에 네 이름과
한 번도 네 입을 떠난 일이 없던
입맞춤 하나를 지니고 살리라.
마추픽추 전망대에 앉아서 네루다의 이 시를 소리내어 읽었다.
도무지 멀리서 들리기만 했던 그의 소리가 처음으로 가까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발파라이소 네루다의 집에서 그의 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이다.
오래된 광고의 카피처럼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네루다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올린 이성복시인의 시, 그의 인용처럼... 세상을 아파한 사람이다.
우리가 민족이라고 말하는 민족과는 정말 다른 민족? 그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들의 민족.
그들 피 안에 내포된 잔혹한 피돌이...
자신 안에 가해자의 피가 흐르면서
자신 안에 피해자의 피가 흐르면서
마구 섞여서 온몸에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고 살아야했던 한 시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시인은 현재를 살지 않는, 그래서 희석되어져가는 자신 안의 흐르는 피의 한 가닥을 찾아 살아내어야 하며...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수집품처럼
그의 집에서 보이는 작은 집처럼
그래서 가느다란 모세혈관에 흐르는 한 방울의 피에 저려하고 있었다.
뭘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만나고 싶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을 숙제로 삼았었다.
나의 한 달 간의 여행 마지막 일정이었던 날을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했었다.
아직은 모른다.
그렇지만, 만난다고 해서 그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분명하다.
다시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그의 단편을 본다면 내가 만났던 그 순간이 그의 단편이 아니라 전체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대하면서...
이는 네루다라는 유명한 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내가 알아야할 세상과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한 방법을 터득한 것으로도 보람찬 날이었다.
새벽 6시 반 숙소를 나가 밤 9시가 넘어서 들어온 날, 그 날은
뜨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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