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놀이
박제천
헤르만 헷세의 글을 재미삼아 안주삼아
나는 술을 배웠다
맥주를 마시며 데미안을 읽었다면
싣달타를 읽을 때는
참 일찍 깨우친 젊은 부처를 생각하며
배갈을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나르시스 운트 골드문트를 읽고서부터는
와인에 맛을 들였다
그러나 유리알 놀이와 접해서는
위스키만 마셔대다가 하마터면
알콜 중독이 될 뻔했다
왕구슬, 쇠구슬만 가지면
모든 유리구슬을 깨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에
그냥 나만 유리구슬로
혼자서 살고 있는 걸 비로소 알았다
술 속 세상에서
아직 살아 있지만, 사는 게 아닌 걸
깨우치고, 깨우침 또한 거짓임을 거듭 깨우치는
말의 놀이, 마음의 놀이를
그에게서 배웠다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알았을까?
내가 한 잔 마시고 싶어한다는 걸.
난 한 잔을 마시고 싶어.
입만 달싹거리는데... 아니 가슴이 달싹거리는데...
딱 한 잔만 아니다.
소주 두 병 정도만 마시고 나면 달싹거리는 입도 붙잡고, 달싹거리는 가슴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처럼으로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지만 참이슬도 괜찮지...
그 정도는 괜찮다.
소주의 쇠맛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
일하느라 신경쓰느라 티 안 내느라 애를 쓴 하루가 들썩거리는데...
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혼자서 술 먹지 말아요.
나 혼자서 술 안 먹어.
에이 저기 저 통에 보니까 맥주 캔도 있고, 소주병도 있어요.
별로 먹지도 않지만 그게 싫어?
혼자서는 먹지 말아요.. 아니 먹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혼자서 을 먹지 말라는 것은 행복해 보라는 말과 같구나.
나와 행복해지자고 말하는 것이구나
어제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일을 하다가 문득 박제천 선생님이 생각났다.
아마 선생님 밑에서 일하는 내내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당사자이시며 언제나 특별히 괴로워할 상대조차 없던 내게 그런 존재로 기꺼이 남아주셨던 분이시다.
그저 뵙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 분이 즐겨 드시는 차가운 청하 한 잔도 더불어 생각이 났다.
내내 술 생각이다.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더니 마침 신작시로 술이 떠 있다.
술은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함께 시작했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법적 나이가 되기 전부터 집안 내력인 관계로 식구들과 술을 마셨더랬다.
그건 법적인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나를 어른이라고 인정해주었던 시점 같기도 하다.
그래 선생님의 시처럼
술을 마실 때쯤 무엇인가를 읽어댔다.
삶이 활자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활자에 박힌 삶들이 하나같이 가혹하고, 홀홀하지 않아 삶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한 잔을 청했던 것 같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도
한 권의 수필집을 일고 난 뒤에도
한 권의 시집을 읽고 난 뒤에도
정말 그 속에 박힌 삶이 하나같이 홀홀치 않다 한 잔을 마셨다.
그렇게 살지도 않은 삶을 배우며 마치 싸인이라도 받듯 마신 술이 이제 내 삶에 싸인을 하려든다.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술은 항상 그 앞과 뒤에 존재했다,
내가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 그저 난 한 삶을 지켜볼 때마다 그렇게 한 삶을 넘겼다는 마음으로 술잔을 든다.
그렇게 유리잔에 담긴 술을 마신다.
나보다도 더 약한 유리잔에 담긴 쓴 술을 마시며,
혹 유리잔을 던져 깨고 싶기도 하지만 그저 유리잔은 두고 쓴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삶을 인정하고 넘어간다.
간절히 한 잔을 원했던 어제도 마치 미결서류처럼 싸인하지 않은 채 남겨두고
오늘도....
선생님의 시 한 편을 읽으며... 그런 것이구나.
누구나 그런 것이구나.
소설 속에서도, 시 속에서도, 수필 속에서도 우리는 모두 한 잔의 술로 삶을 넘겨야 할 만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서서히 들썩거리던 입과 가슴이 가라앉는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말고,
재빨리 싸인을 하지 말고,
그저 좀 미루어 두라고 아이는 내게 말하는 듯 하다.
지금이 내 삶의 한 고비라고 술 한잔으로 넘기지 말고, 아직은 한 고비라고 인정하지 말기로 한다,
그저 내일의 일까지, 모레의 일까지, 그리고 한 달 뒤쯤의 일까지 모두 같이 한 편의 시를 만들고 소설을 만들기로 한다,
삶은 그렇게 잘라내서는 안되는 무엇이니까...
마디를 길게 가자.
어느 날은 마디 하나 툭 잘라 한 병 만큼은 들만한 마디를 만들어 한 병 한 잔을 거뜬히 해결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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