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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정호승]내 얼굴에 똥 싼 갈매기에게

by 발비(發飛) 2007. 9. 19.

 

 

 

내 얼굴에 똥 싼 갈매기에게

 

정호승

 

고맙다 나도 이제 무인도가 되었구나

저무는 제주바다의 삼각파도가 되었구나

고맙다 내 죄가 나를 용서하는구나

거듭된 실패가 사랑이구나

느닷없이 내 얼굴에 똥을 갈기고

피식 웃으면서 낙조 속으로 날아가는 차귀도의 갈매기여

나도 이제 선착장 건조대에 널린 한치가 되어

더 이상 인생을 미워하며 잠들지 않으리니

나도 한번 하늘에서 똥을 누게 해다오

해지는 수평선 위를 홀로 걷게 해다오 

 

 

공감하고 공감하지 않고의 차이는 단 하나라도 같은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는가 아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삶에서의 공감의 의미.

이것은 내 공간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딱 나만큼의 공간을 하나 더 확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공감하는 대상을 만나 공감한 것을 나누면,

내가 가졌던 생각의 공간만큼을 덤으로 하나 더 얻어,

난 좀 더 여유로운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찾는다.

사람을 찾고, 자연을 찾고, 영화를 찾고, 책을 찾고, 시를 찾고,

뭐 그런 것들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나의 공간을 좀 더 넓게 확보하여 내 몸과 마음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를 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정호승시인의 새로운 시집 <포옹>에서 찾은 '내 얼굴에 똥 싼 갈매기에게'라는 시는 나에게 공감을 주어 공간을 선물해 준 시이다.

 

-잠시 딴 소리-

 

시집은 사서 읽는다.

서점에서 뒤적거리며 사기도 하고, 아니면 어느 시인의 경우는 시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사기도 한다.

시집을 서점에 서서 읽으면, 말하자면 돈을 지불하고 읽지 않으면 이상하게도 시가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하게도...

그래서 되도록이면 시집을 사서 읽게 되는데,

시집을 사서 돌아오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후루룩 읽다가 멈춰지는 시를 발견하는 경우는 최고이다. 단 한 편이 필요해서 시집을 사는 듯 싶다.

(이것은 유행하는 단 한 곡의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을 사서 듣다가 몇 달을 듣고 지겨워질무렵 더 오래도록 들을 수 있는 다음 곡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시집도 처음에는 단 한 편의 시만 거듭 읽게 된다.)

처음 시집을 만났을 때는 단 한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버스나 전철에서 그 한 편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일차적으로 실망스럽다.

집으로 돌아와 시집을 책상 위에 던져둔다.

컴을 하거나, 뭘 하다 옆에 놓인 그 시집을 읽는다.

그러다 꽂히는 시가 발견되면 이 경우에는 앞 뒤의 시도 꼼꼼히 읽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참을 두고 구경을 한다. 최고의 희열은 주지 못하지만 보람차다고 좋아한다.

시집을 사서 읽으면 나의 경우 순간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고, 꽤나 오랜 시간동안 적당한 온도의 열뜸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래서 난 시집을 사게 된다.

그냥 생긴 시집의 경우, 난 대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

 

-잠시 딴 소리 끝-

 

다시 공감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제주를 가면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자귀도의 갈매기를 본 적이 있다.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binaida01/8161147 에 가면 갈매기들이 낙조를 대하는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경이롭다 할 정도입니다. 저도 이 시 덕분에 다시 보았는데... 멋지네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해질녘 제주의 서쪽 바닷가 앉아 있노라면,

갈매기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든다.

모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나 둘 씩 모여들어 한 곳을 바라본다.

그러다 몇 마리쯤은 머리위로 날아오르기도 한다.

지는 해를 앞에 놓고 그 심드렁함과 느린 날개짓을 하고 있는 갈매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무심해 보이는 것이

그러면서도 뭔가 하늘과 좀 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는 듯이,

그들 사이에 있는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다.

몰려드는 갈매기 사이에 있노라면 내가 마치 재판이라도 받는 듯한 기분이다.

한 두 마리 씩 그 수를 더해갈 때마다 주눅이 들며, 이 곳은 하늘의 영역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지.

땅에 내려앉는 하늘의 것들.

땅에 사는 하늘로 가야할 것이 하늘의 것들을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하늘로 갔을 때 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기도 한다.

그들은 하늘에서 자유롭다.

난 하늘로 가기 전, 좀  떨릴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말한다.

하늘의 것이 내 머리위에 똥을 싼다면, 땅에 발을 디디고 살 동안 하늘의 것이 내 머리에도 꽁하고 꿀밤 한 대 맞고 작은 면죄부라도 얻게 된다면, 하늘에 대한 부담감으로 부터 좀 더 가벼워질 것 같다고...

그래, 나누어 벌을 받았으면 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것은 익숙하다.

이런 것을 '나와바리'라고 하나? 아직 땅은 나의 '나와바리',

이 곳에 있을 때 벌 좀 덜 수 있다면, 하늘이 좀 더 두렵기도 할 것 같다.

삶을 미워하고 지겨워한다는 것은 삶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

수백마리의 갈매기가 땅으로 내려오는 태양앞에서 당당하듯,

태양이 사라지자 태양이 없는 하늘로 높이 올라 하늘을 지키듯,

나도 태양앞에서 당당히,

하늘을 나를 때도 당당히,

할부로 갚아나가는 죄와 벌!

 

공감이다.

석양 앞에서 도열한 갈매기를 보지 못했다면 이 한 권의 시집 중에서 이 시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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