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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기형도] 빈집

by 발비(發飛) 2007. 9. 17.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오후 추석전에 꼭 나왔으면 하는 책때문에  정신없이 이것 저것을 챙기고 있었다.

얼마전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 고택의 역사와 그 곳에서 묵을 수 있는 정보서인 관계로 사진이 무지 많다.

사진과 글을 챙겨야 하고, 지리적인 위치에 대한 확인도 해야 하고... 체제도 맞추어야 하고... 

나대로는 일정대로 몸이 알아서 머리가 알아서 잘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신문을 들고 나타났다.후배 직원이 매주 월요일이면 날라다 주는 섹션 신문,

잠시 기계처럼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신문을 폈다.

신문의 잉크냄새가 쏴하게 몸으로 퍼져 들어온다. 새로운 공기이다. 시원한 공기이다. 본드를 마시면 이런 기분일런지도 모른다.

뒤적 뒤적...

발견한 시 한 편.

기형도 시인의 빈집.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창밖 세상을 떠돌던 겨울안개는 곧 사라질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 또한 빛을 잃을 것이고

공포의 극대화만 기다리던 흰 종이는 누렇게 변해갈 것이고

망설임 대신 글썽이는 눈으로 네 뜻을 전하며 떨어지던 눈물은 말라갈 것이고

 

이제 더 이상 내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텅비어버린 내 안의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전쟁같은 이 시간이 지나면 내 속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서서히 비어가는 집.

결국은 빈집, 쓰러져 갈 집, 사라져 갈 집, 아무 것도 아니게 될 집.

그 집을 위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정신없는 오후의 일상 속에서 만난 빈집이라는 시 한 편,

죽은 자가 쓴 빈집이라는 시 한 편,

 

그는 내게 말하는 듯 했다.

넌 무얼 위해 집을 가지고 있느냐 했다.

몸이라는 집을 어떻게 하려고,

 

아직 내 몸 밖에는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세상이 있고,

내 몸에는 여전히 하얀 초에 빨간 불을 켜 두면 나의 얼굴이 붉게 비치는 거울이 있고,

난 지금도 하얀 종이위에 나의 꿈을 긁적이고 있고,

그리고 그를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가슴이 조여들면서 솟는 눈물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내 몸이 살아있음을...

 

 

다행이다!

집이 완전히 비어있지는 않다. 참 다행이다!

 

신문을 덮고, '빈집'이라는 시는 가위로 오려 책상 밑 유리깔판 밑에 끼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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