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고택에 관한 두 가지 풍경
풍경. 하나
고등학교 2학년 교실 6교시쯤 한문시간.
뒤에서 두번째 복도쪽으로 앉아 있던 나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그리고 길다란 손가락을 가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교과서가 아닌 프린트물을 한 장 씩 나눠주셨었다.
거기에는 성리학, 퇴계 뭐 그런 말들이 적혀있었었다.
난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공연을 보려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들의 한문선생님은 항상 짚신을 신고 다니셔서 '짚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청소시간이 되면 길다란 자루걸레봉을 들고다니시며... "뭐해!" "뭐해!"를 외치고 다니셨던 행동이 큰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은 한문시간이 되면 우리보다 더 지루한 표정으로 한문수업을 하시곤 하셨는데,
그런 그 분이 프린트물을 내어주시더니 마치 한 편의 연극 공연을 하시듯, 퍼포먼스를 하시듯
손과 발을 흔들며 구르며 아무도 듣지 않는.. 거의 대부분이 졸고 있었던 그 수업에 빠져 계셨었다.
그 때 난 생각했다.
한문이라는 것을 배우면 저 선생님처럼...
그때부터 난 한문학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문학과를 갔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한번도 뵌 적이 없었다.
풍경. 둘
대학교 2학년, 열흘동안 여름봉사활동으로 경북 봉화군 어디를 갔었다.
그 곳은 청량산 자락 어디였는데,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옆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계곡물소리,
하얗게 물위로 올라오는 안개.
산과 산 사이에 계곡 위에 걸쳐진 구름다리.
그 위를 몇 번이고 왔다갔다 했던 기억과 함께
계곡의 깊은 물살때문에 산자락이 끊어져 홀로 산이 된 고산에 지어진 '고산정'이라는 정자, 그 정자에 붙은 퇴계선생님의 시.
그 곳에서의 아침은 마치 꿈인듯 했었다.
그 이후 그 곳을 한 번도 다시 가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기.
'고택스테이'라는 책을 편집 진행하고 있다.
불교신문의 여태동기자께서 집필하신 우리나라 명문가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을 묶어놓은 책으로,
명문가에서 난 훌륭한 인물에 대한 소개와 각 가문별로 독특하게 지어진 한옥들의 이야기와 직접 아이들과 답사한 체험기가 실려있다.
아마 다음 주말쯤이면 발간될 예정이다.
그 곳에는 바로 나의 고등학교 때 한문선생님이신 이성원선생님이 종손으로 계신 농암이현보 고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성균관대학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선생님께서 안동에서 교사를 하신 이유는 오직 종손이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었다.
반가운 마음이 가득하면서 '우리선생님 집인데...'하면서 흥미롭게 책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다 추천의 글을 받을 분을 저자와 같이 논의하게 되었는데,
순간... "제가 한 분을 맡을테니 기자님께서 한 분을 맡으세요."
그리고 이제는 한문선생님이 아니라 농암고택의 종손이며, 농암 이현보선생의 뒤를 이은 강호문학연구소 이성원선생님으로 살고 계신
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전 **여고 9회 졸업생 ***입니다. 기억하시지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한 시간 수업때문에 한문학을 전공한 제자입니다."
웃기부터 하신다. 그러더니 ... 앞도 뒤도 없이.
"그래 한문학과 가서 인생이 고달프지는 않았나?" 하신다.
"좀 고달프긴 했습니다. 취직이 안되어서요.. 그런데 학교 다니는 동안 한문공부는 재미있었습니다."
"아 그럼 됐지 뭐! 지금 살아있고, 그 때 재미있었고 그럼 됐네. 근데 지금은 뭐하고 사노?"하신다.
"네 지금은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도 공적임무 수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한테 무슨 볼 일이 있노?"하신다.
"아,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고택스테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선생님께서 고택을 지키시는 종손으로서 추천의 글을 써주셨으면 해서요."
"내가 어째 그런 걸 하노? 니가 알아서 해라."하신다.
"선생님, 선생님이신데요, 제 인생을 바꿔놓은 분 중의 한 분 이신데요. 수고스러우시더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참... 그래 알았다. 내일 밤까지 해주면 되나?" 하신다.
"네.. 진짜 감사합니다. 그보다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더 반갑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책이 다시 맺어준 인연이구나 생각하면서,
농암고택 체험장을 운영하시면서 홈페이지도 같이 관리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농암고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선생님처럼 정갈한 모습의 홈페이지.
농암 이현보 선생님의 싸이트와 농암고택의 싸이트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농암 이현보선생님의 고택은 댐 공사로 인한 수몰지구에 있었고, 물에 갇힌 마을에서 한옥들을 옮겨다가 산 위에 올려놓고 마을 전체가 갈 곳 몰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농암고택이 있다는 그 동네의 주소가 봉화면 가송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다.
그러다 사진 갤러리에 들어갔더니, 그 곳이 바로 고산정이 있던 내가 꿈을 꾼 듯이 본 그 곳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농암고택을 이건하신 경위를 밝힌 글에 처음으로 가송리에 들어서면서 첫눈에 반한 심정을 풀어놓은 그 마을의 풍경은 내가 본 풍경 그대로였다.
머리가 하얗도록 반가웠다.
그 분이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구나.
학교는 그만두셨지만, 선생님의 홈페이지에 도산기행이라는 코너에 차곡히 재여있는 선생님의 글들...
그것은 수업시간에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지만, 온 정열을 다해 강의를 하시던 모습 그대로였다.
농암선생님의 문학세계를 이어 강호문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시고,
퇴계선생님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연구하시고,
농암고태과 관련된 사료들을 모아 그 연구결과를 하나씩 쌓아두셨다.
어찌나 좋던지...
한문학이라는 것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 농암고택의 종손으로 살아가시면서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분의 그 자리여만 가능한 그 일들을 해나가고 계신 분이라 너무 존경스러웠다는.. 그리고 마치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럽더라는 ....
그래서 선생님께 글을 남겼다.
선생님이 계신 곳이 내가 꿈꾸듯 아침을 맞았던 곳이었으며, 선생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그 일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통화중에 선생님께서 고택에 대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고택은 나무로 된 건물이다. 나무로 된 건물은 사람의 손이 닿으면 500년도 더 가지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3년을 못 버티고 쓰러지고 만다. 난 이 집을 위해서 이 집에 사람들이 드나들게 하고 싶었던거다. 그럼 600년이 된 이 집은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만나라고 하고 싶다. 집안의 600년 조상의 이름과 업적을 알고 있는 나를 만난다는 것은 우리 후손에게 든든한 뿌리를 주는 것과 같다. 그건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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