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을 나오려다 비누가 눈에 띄었다.
포장용틀위에 얹혀있다. 그것도 거꾸로 엎어진 틀위에 당그랗게 비누가 올려져 있다.
비누가 물에 불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올려놓은 것은 나다.
아슬한 비누틀 옆에 크리스탈 빛의 맑고 투명한, 코발트빛 불가사리 무늬가 있는 비누곽은
오래 전부터 비어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엄마가 그랬었다.
목욕탕에 들어가면 비누곽에 정상적(?)으로 잘 담겨진 비누가 있기를 원했다.
그런데 항상 이상하게 그리고 기발하게 생긴 것위에 비누를 올려놓아야 했다.
우리집의 비누곽은 목욕탕이 아닌 엄마의 화장대위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혹 친척들이나 친구가 오면 우리집 곳곳에 놓인 이상한 물건, 이상한 위치들에 대해 난 민망했었다.
누군가에게 설명이 필요했던 물건들의 사용법들.
그런데 내가 나의 목욕탕에 버젓이 비누곽을 두고
조그만 틀 위에다 비누를 아슬하게 올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인 오늘 아침,
난 다시 엄마를 향해 '아무튼 못 말리는 ....' 하면서 투덜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냉장고 안에는 참 여러사람들의 김치가 들어있었다.
친구1이 가져다 준 좀 오래되어 곰 삭은 쨍한 김치,
친구1이 가져다 준 전통적인 젓갈김치,
친구2가 가져다 준 심플버전의 시원한 김치,
엄마가 지난 가을 가져다 준 노지배추김치,
그리고 엄마가 지난 주에 가져다 준 얼갈이 김치,
내가 오래전에 담은 식초가 되기 직전인 양배추김치,
나의 냉장고 안에는 다른 것이 없이 이 김치들의 오막조막한 통들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난 필이 꽂히는 대로 이 김치 저 김치를 마치 여러 반찬을 골라 먹듯,
골라먹은 재미가 유일한 내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식도락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냉장고를 열어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며칠 전 다녀간 엄마가..... 엄마가....
그 김치들을 보람차게 두 통에 함께 담아, 잘(?) 정리해 놓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악! 하고는 김치통을 열어보니, 김치의 구분이 없어졌다.
하나의 맛이 되어버렸다.
투덜거리며 대충 아침을 챙겨먹고는 세수를 하러 들어간 목욕탕에서 다시 아슬한 비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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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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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랫동안 엄마의 특별함에 대해 정신적으로 반항하며, 난 특별함이 아닌 지극한 평범함으로 사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였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고구마를 삶아주고, 전을 부쳐주고, 연속극에 목을 메고, 책과 신문은 절대 읽지 않는,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옆집 아줌마들에게 전해듣는 것이 전부인 여자, 딱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자,
내 친구의 엄마같은 여자를 꿈꿨다.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사는 여자를 꿈꿨다.
중학교때 나의 꿈은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짓는 농부에게 시집가는 것이 유일한 꿈이며 숨겨둔 꿈이었다.
며칠 전 엄마와 아버지가 집으로 내려가기 전
같이 저녁을 먹으며 난 비빔냉면, 아버지도 비빔냉면 그리고 엄마는 들깨 수제비를 시켰다.
"아버지를 닮은 나, 나를 닮은 아버지. 아버지를 닮은 나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나를 닮은 아버지."
하고 떠들면서 우리 모두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황당한 김치를 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비누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나도 여기 저기 담겨진 다른 맛의 김치보다는 깔끔하게 정리되어진 한통의 한 가지맛으로 정리된 김치를 더 좋아하게 될런지도 모른다고.
"엄마를 닮아지려는 나, 엄마에게서 나를 닮은 모습을 보게 되는 나." 차라리 그렇게 말할 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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