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컴퓨터로 쿵덕쿵덕거리며 놀고 있다,
갑자기 모니터가 파랗게 변하더니, 20폰트정도 크기의 영문들이 화면 전체에 쫙 깔렸다.
윙 윙
소리를 내며 작은 노트북 몸덩이가 불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불에 데인 상처를 차가운 물에 집어 넣듯
윙 윙 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주었다.
몇 년 전처럼...
좀 쉬게 해줬다.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너무 많이 열심히 일했나봐 쉬어야 해 그러면서.
(몇 년 전 그 때 동생이 그랬지. 노트북은 사람이 아니야, 수리를 해 줘야 돼. 결국 수리라는 것을 했었지.)
그때 수리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잠시 쉬게 해 주기로 했다.
노트북의 열이 가라앉고
조심스럽게 다시 전원을 켰다.
다시 윙윙거리며, 윈도우 화면이 뜨다 말고 파랗게 질렸다.
전과는 다른 것이 파랗게 질린 화면 사이로 활자들이 천천히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보이더란 말이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떴다 사라지고.
그 때 난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윈도우 엑스피가 처음 나왔을 때 참 느리게 움직인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느린 대신 뭔가 해결능력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내가 느리지만 엑스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생력 같은 것 때문이지.
그래 엑스피니까 혹 스스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도 있을거야 하며.
정말 컴퓨터에 문외한인 나는 기다린다.
아주 오랫동안 파랗게 뜨다가 다시 시스템이 저절로 꺼지고, 다시 저절로 켜지고
또 파랗게 질리고
잠시 윈도우가 떴다가 사라지고
정말 오랫동안 혼자서 그렇게 온 몸으로 난리를 치는 것을 팔짱을 끼고 보기만 하고 있었다.
거의 해가 밝아 올때까지 그렇게 뭔가 윙윙... 모른 척
아는 영문이 뜬다
포멧,
다시,
완전히
뭐 그런 말들...
선택을 해야 했다.
내일 누군가를 불러서 수리를 하면 파일 몇 개 쯤은 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윙윙 거리며 내게 뭔가 해주길 바라는 듯 목 쉰 소리를 지른다.
예스!
그리고 도시바 노트북을 처음 받았을 때의 씨디를 찾았다.
드라이브에 씨디를 넣는 순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분쯤 혼자서 윙윙.
난 환하게 밝은 해를 보면서 노트북은 내버려두고 잠을 청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환자가 혼자서 사투를 벌이고 침대맡에서 잠든 보호자의 모양, 잠을 잤다.
한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본 노트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처음 노트북을 샀을 때 모양으로 도시바프로그램으로 초기화 되어있었다.
씨와 디 드라이브를 열었다.
뭐가 남아있고 뭐가 사라졌는지....
사라졌다.
없다.
한글도 없고
포토샵도 없고
엑셀도 없고
그리고 초기환경이, 처음 이 노트북을 샀을 때처럼 .....
하지만 말이다.
메모리 양이 반도 안 차고 텅 비어 있었다.
헐렁한 교복을 입은 것처럼 싱그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제어판으로 들어가 모든 것이 영어버젼인 환경을 한국어 자판이 가능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건 여행중 피씨방에서 보던 딱 그 버전이다.
모든 것이 다 영어.... 한국어를 원하면 코리안을 선택해야 했던 그 신선함이 그대로.
웃기게도 난 조금 설레였다.
잠시 이렇게 둘까 생각 중이다.
낯선 피씨방에서 외국인들 사이에서 영어키보드판에서 오직 손의 기억만을 의지해 자판을 두드리던 그 필을 그대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곧 지치겠지.
그리고 온갖 프로그램들을 깔겠지.
그리고 곧 잃어버린 사진이나 일기같은 것들로 바탕화면이 가득 차 가겠지.
내공이 하늘을 찌른다!
난 그렇게 말했다.
만약 전같으면 방방 뛰었을 것이다.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을 다 잃어버렸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잃을만 했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나보다.
내가 한 일들이 맘에 들지 않았었는데,
컴이 대신 버리지 못한 것들을 버리게 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시원하기까지 하다.
그래 시원하다.
아직 난 노트북의 어떤 프로그램도 쓰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인터넷 자판만이 두드릴 수 있다.
다시 작업하자.
다시 일을 하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몸에 맞지 않은 커다란 교복을 입은 입학식의 모습과도 같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입학식,
도시바입학식,
모든 단어들은 낯선 영문판... 물건너온 나의 노트북이 한참을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듯이
이젠 내가 도시바노트북에 처음부터 다시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난 점점 익숙해지면서 편해질 것이고
도시바노트북은 점점 커져가는 내 몸뚱이를 담아내느라 허걱거릴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쬐금만 걱정되는 내가 이상하다.
그렇지만
.
,
.
혹 저를 아시는 이가 계시다면 위로의 한마디는 듣고 싶기도 하다.
어쩌니?
그래서 어쩌니?
그런 마음이 있기는 하다.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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